염기훈, 그의 영구머리에 얽힌 안타까운 사연
“머리를 기르지 말까 봐요. 사람들이 이 땜통으로 저를 기억하는데, 기르면 못 알아볼 것 같아서요. 친구들이 경기 전에 하이모 쓰고 나가래요. 매직으로 칠하고 나가라는 애들도 있고. (웃음) 요즘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늘어났는데요, 스타도 아닌 저를 재밌게 또 좋게 봐주시는 게 그저 고마울 뿐이에요.”
문제의 왼쪽 땜통을 가리키며 염기훈(전북현대, 23세)은 웃었다. 가을햇살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그의 미소는 유난히 밝고 환해보였다.
지난 8일 상암에서 열린 가나와의 친선경기. 베어백 감독은 23세 이하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선발 라인업에는 그동안 A매치 경험이 한 번도 없던 신인 선수들의 이름이 보였다. “저 선수는 누구야?” “도대체 어디서 뛰던 선수야?” 그러나 소란도 잠시. 한 선수의 모습이 전광판에 크게 잡히자 관중석에선 어느새 웃음보가 터졌다. 염기훈 때문이었다.
“제 머리가 그렇게 웃겼나요? 많이들 웃으셨다고 들었어요. ‘염기훈 땜빵’ 이 인터넷 검색 순위에도 올라갔다고 하던데요. (웃음) 저는 정말로 뛸 줄 몰랐어요. 경기 전날 친구랑 통화하는데 친구가 그랬어요. 가나전에는 아시안게임 멤버 위주로 뛸 거라고. 제가 뛸 수 있을 거라는 기사를 봤다면서 기도 많이 하고 자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만해도 기운 내라고 친구가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출전선수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 거예요. 선발로 뛰게 되다니요. 그것도 가나라는 강팀이랑. 너무 좋았고 또 떨렸어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온 몸에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A매치 데뷔전이라 많이 긴장한 것도 사실이에요. 제 스스로 부족한 점도 많이 깨달을 수 있었고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제 앞으로 열심히 노력할 일만 남았죠.”
왼쪽 머리에 위치한 상처는 많은 이들을 웃게 만들었지만 사실 웃어넘길만한 수준은 아니다. 이마와 머리에 길게 자리 잡은 흉터를 볼 때면 그가 당한 교통사고가 얼마나 심했을지 절로 짐작될 정도다. 확실히 교통사고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염기훈, 그의 복귀와 재기가 더욱 눈부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사고 전 염기훈은 5골 4어시스트(전기리그:1골, 컵 대회:4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그 덕분에 ‘2006 K-리그 주목할 만한 신인’ 중 하나로 뽑혔고, 7월 25일 저녁 그와의 인터뷰가 잡혔다. 오후 2시 쯤 됐을 때, 다시 한 번 인터뷰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문자를 보냈다.
“염기훈 선수, 오늘 서울 오면 인터뷰 잊지 말아요.”
“안 잊었어요. ^^ 지금 숙소로 가고 있어요. 3시에 출발이니까 있다 뵈요.”
염기훈은 “숙소로 가고 있다” 며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열심히 대답하겠다” 고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2시간이나 기다리다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만해도 문자를 주고받은 지 정확히 30분 후, 그가 탔던 차량이 전복돼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살면서 그렇게 피 많이 흘린 적이 없었어요. 숙소 앞에 육교 있죠? 거기가 사고 지점이거든요. 숙소 거의 다 와서 사고가 난 거예요. 사고 딱 나는 순간,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다음날 열리는 성남 원정경기였어요. 아픈 거 그런 거보다 아, 큰일 났다. 내일 경기 있는데 큰일 났다. 어떻게 해야돼나. 그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피는 막 나는데도. 큰일 났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돼나. 그 생각하면서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피는 계속 흘러서 어느새 옷은 다 젖고… 정말 피가 줄줄줄 흘렀어요. (김)형범이는 그 자리에서 큰일 났다고 소리 지르고 자기 옷으로 내 피 계속 닦고… 그때 저만 다쳤거든요.”
“세탁물 찾고 숙소로 가면서 좌회전하다 반대 차선에 있는 차랑 부딪힌 거예요. 정말 영화에서처럼 3바퀴를 굴렀어요. 3바퀴 구르고 뒤로 전복돼서 70m 가량 쪽 미끄러져갔어요. 그래도 정신을 안 잃은 게 참 다행이에요, 정신을 잃었으면 여기 머리 전체가 싹 나갔을 거예요. 바닥에 긁힐 때 제 머리가 긁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스팔트 긁힌 느낌은 당한 사람만이 알아요. 안 당한 사람은 몰라요. 그 느낌, 진짜, 아, 말로 표현 못하는데, 긁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개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밖에 안 다쳤는데 정신을 잃었으면 싹 나갔겠죠. (싹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죽었을 수도 있겠죠. 정신을 잃었으면 계속 긁히는 거잖아요. 70m 가량을 그렇게요. 그럼 여기 다 파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뇌가 다쳤을 지도 모르구요. 고개를 이렇게 들었는데도 병원에서 상당히 많이 파였다고 그러더라고요.”
“팔도 심하게 다쳤는데요, 사고 났을 때 (왕)정현이 형 형수님이 그 현장에 있었어요. 반대편에서 신호 기다리려고 있었거든요. 깜짝 놀랐대요. 선수들 다치는 걸 봤으니까. 그때 어떤 사람 팔이 창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창문 밖으로 팔이 나와서 다 긁힌 것 같아요. 처음 다쳤을 때 여기 팔은 뼈까지 다 보였어요. 그래도 뼈가 안 부러진 게 어디에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스팔트에 긁히면서 이마랑 머리, 팔 할 것 없이 돌멩이가 다 들어갔어요. 병원에서 그 돌멩이를 다 빼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구둣솔 있죠? 구둣솔로 막 긁어냈어요. 마취를 했는데도 너무 아팠어요. 그냥 사정없이 긁어내더라고요. 그래도 사고 났을 때 피가 많이 났는데 운이 좋은 게 사고 나자마자 반대쪽에서 바로 경찰차가 왔어요. 지나가다 본 거예요. 그 덕분에 119차도 금방 왔고요."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괜찮다며 그는 사고 당시 이야기를 해줬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라고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꿰맨 부위에 더 이상 머리는 나지 않는다고 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땜통은 바로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그 때문에 ‘영구’ 라는 별명도 생겼고, 아직도 사람들은 그의 머리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 결코 웃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어머니다.
“사고 다음날 소독 때문에 붕대는 푸는데 어머니가 우시더라고요. 큰 상처인 줄 모르셨어요. 어머니가 오셨을 땐 붕대를 감은 상태라 상처를 볼 수 없었거든요. 그냥 조금 찢어졌구나, 하고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제 상처가 굉장히 심했거든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어요. 이렇게 많이 다쳤구나, 하시면서요. 그러더니 막 우시더라고요. 요즘도 인터넷에 올라온 제 사진들을 보며 속상해하세요. 사진에 흉터가 그대로 나온다면서. 그래도 저는 감사해요. 다시 운동할 수 있게 됐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축구를 다시 할 수 있어서, 다시 건강해져서 국가대표까지 뽑혀서 정말 행복해요.”
그러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릴 수 없었다. 다시 예전처럼 잘할 수 있을까? 몸 상태는 돌아올까? 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생각과 걱정은 매 순간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속상했고 아쉬웠다. 그리고 답답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줄 수는 없었으니까.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 그러했다. 다친 머리보다 마음이 더 아픈 시간이었다.
“너무 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지경이었다” 던 그는, 지난 9월 16일 삼성 하우젠 K-리그 2006 후기리그 대전과의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뛰며 귀환소식을 전했다. 교통사고를 당한지 꼭 한 달 반 만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최강희 감독은 “염기훈이 워낙 잘했기 때문에 1대 0으로 이길 수 있었다” 며 “상당히 만족스런 복귀전” 이라 평했다.
“처음엔 많이 걱정했어요. 다치기 전에는 몸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복귀하게 되면 예전보다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하며 지냈는데… 다행히 형들이나 동료들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 덕분에 경기를 잘 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흘 후 열린 AFC 챔피언스리그 4강 상화이 선화와의 경기에서 염기훈은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후반 23분 그림 같은 헤딩골을 성공시키는데 이어 후반 32분에는 시원한 코너킥으로 정종관의 골을 도운 것이다. 지난 7월 19일 대구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이후 꼭 두 달만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다른 때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골 넣고 그 짧은 시간에 사고 나서 힘들었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여기 보세요. 제 상처가 이래요. 여기 소독할 때 만날 울었어요. 소독할 때가 제일 아프거든요. 소독약을 붓기만 하면 괜찮은데 솔 같은 걸로 막 긁어요. 항상 피를 내줘야된대요. 그래야 새살이 빨리빨리 난다고. 그래서 살살 긁는 게 아니라 힘을 꽉 줘서 막 비비는 거예요. 여기 다 긁어내야한다면서 세게 긁었는데 너무 아파서 정말 만날 울었어요. 아침저녁으로 만날 울고 그랬던 게 막 생각나더라고요. 다치기 전까지는 몸이 진짜 좋았는데 이제 다시 복귀해서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됐고… 정말 병원에서 혼자 별별 생각을 다했어요. 그런데 복귀하자마자 2번 째 경기 만에 골을 넣었어요. 기분 정말 좋았죠. 저도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봤어요. 제가 골 넣는 장면. 아, 제가 봐도 울려고 하는 게 보이는 거예요. 울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프로 와서 넣은 골들 중 제일 기분 좋았던, 그래서 절 행복하게 만들어준 골이었어요. 데뷔골도 좋았지만 그 골이 더 좋았어요.”
폭풍우가 몰아친 뒤엔 날이 개는 법. 병실에 혼자 앉아 슬퍼하던 시간도 끝났다. 유난히 높고 푸른 하늘이 빛났던 9월의 어느 날, 염기훈은 베어백 호 3기에 발탁됐다. 바로 다음날에는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대표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수많은 축하전화가 쏟아졌고 기자들은 전주까지 찾아와 소감을 물었다.
“제가 뭐 잘 하나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선수에요. 잘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더구나 저는 청소년 대표팀에서 뛴 적도 없어요. 이번에 뽑힌 선수들 보면 다들 그런 경력은 하나씩은 있던데… 그저 배우겠다는 생각뿐이에요. 가서 정말 열심히 하려고요.”
지극히 신인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염기훈스러운 대답이기도 했다. 포도밭을 일구던 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빼닮은 것일까. 그의 아버지는 태풍 때문에 수확을 앞둔 포도를 잃게 됐을 때도 희망을 생각하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염기훈은 늘 한결같고 넉넉하다. 쉬이 포기하지도, 또 좌절하지도 않는다. 시리아와의 아시안컵 예선전 전날에도 “예비 엔트리에 못 들면 관중석에서 열심히 응원하며 보겠다” 며 웃었다. 마주하는 이의 마음까지 웃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염기훈을 만났던 2004년 가을이 생각난다. 남해에서 열렸던 추계대학연맹전. 당시 그는 왼발을 제법 쓰는 호남대 선수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염기훈은 실로 높고 큰 선수로 성장했다. 아마도 그가 가진 성실함과 묵묵함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으리라. 지난 2년 동안 그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다.
“(박)지성이 형처럼 열심히 뛰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이번에 (설)기현이 형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대표팀에 와서 배우고 느꼈던 것들 잊지 않을 거예요. 경기장에서 저를 믿고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해 노력할래요.”
“아, 맞다. 아무래도 아시안게임 때까지 머리가 다 안 자랄 것 같은데, 그때도 사람들이 제 머리 보면서 많이 웃겠죠? 음, 그래도 이 머리로 저 알아보는 거니까 감사히 생각하면서 뛰려고요. (웃음)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역시나 이 유쾌한 청년은 마지막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뭔가 잘난 척을 해도 좋으련만 끝까지 순박했고 또 구수했다. 바로 내일, 별이 된다 할지라도 처음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을 사람. 바로 그가 염기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