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내 사랑

송추 가는 길, 첫번 째 이야기

헬레나. 2003. 2. 13. 01:44

지난 겨울, 기말고사를 앞두고 잠을 줄였던 그 기간동안 나는 버스만 타면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송추까지 가서 울면서 길을 헤맸던 적이 2번이나 있다. 송추의 밤은 무섭다. 저 멀리 아파트 불빛만 보일 뿐, 사람한명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 밭밖에 없고 밭 옆에는 중랑천이 흐른다. 밤에 보는 중랑천은 더 무섭다. 귀신이 살고 있는 마을같이 보인다.

 

송추에서 길을 헤맨 날, 한번은 럭비부 친구에게 한번은 야구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 길을 잃었다고. 보통 애들같으면 송추가 어디야? 하고 물었을테지만, 그 친구들은 밥만 먹고 운동하는데가 송추인지라 어떡하냐며 아주 많이 걱정해줬다. 차라리 콜택시를 불러 집까지 타고가라. (택시가 잘 안다니는 곳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돈 없으면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오라고 해라. 지금 송추에 있다면 데리러 가줄텐데 집에 있어 미안하다, 등등. 길도 잃어 막막한 그 순간에 그 짧은 걱정과 위로는 힘이 됐다. 그 덕분에 눈물 쓱 닦고 1시간 정도 걸어 의정부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송추. 송추에는 우리학교 5개운동부 중, 야구부, 럭비부, 농구부, 축구부가 운동할 수 있는 시설과 숙소가 있다. 야구부의 경우 학교 녹지운동장에 야구부 연습공간이 없어 송추 마운드에서 운동을 한다. 그래서 야구부원들은 송추 숙소에서 먹고 자며 생활한다. 얼마 전 03학번으로 입학할 예정이었던 구본원 군이 자살한 장소도 송추에 있던 야구부 웨이트 트레이닝장이었다.

 

또한 농구부의 경우 송추에 농구장이 있지만 웬만한 경우가 아닌이상 가지 않는다. 애기능 캠퍼스에 있는농구장에서 매일 연습하며 고연전을 앞둔 합숙기간에도 역시 연수관에서 다같이 생활하며 새벽운동, 아침운동, 오후운동, 야간운동을 한다. 반면에 럭비부나 축구부의 경우는 고연전을 앞둔 합숙기간에는 송추로 내려가 그곳에서 생활한다. 물론 축구부의 경우 초반에는 오후에 송추에 와서 연습게임을 하고 다시 안암동으로 오지만, 9월 중순에 접어들면 송추에서 합숙생활을 한다. 럭비부의 경우는 9월부터 송추에서 합숙생활 시작이다.

 

농구부와 달리 럭비부와 축구부가 송추에서 운동을 하는 이유는? 야구부야 학교에 야구장이 없어서 그렇지만 럭비부나 축구부의 경우 녹지 운동장이 있지 않는가? 답은 바로 송추구장의 '잔디'라고 할 수 있다. 고연전 때 잠실 주경기장에서 시합을 하는 그들. 잠실 주경기장은 그래도 각 종목 별 대표들이 시합을 하는 곳이 아닌가. 88 서울 올림픽도 치뤘던 그곳. 당연히 그라운드에는 초록 잔디가 촘촘히 깔려있다. 그들은 고연전 당일날 뛸 그라운드의 잔디에 적응하기 위해 송추구장 잔디밭에서 훈련을 한다. 또한 잔디는 부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부상방지와 적응훈련.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은 송추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운동을 하는 것이다.

 

고연전 전력분석 취재를 위해 상현이와 이진이와 같이 송추에 갔던 날. 의정부역에서 송추가는 기차를 탔다. 집 근처라고 천천히 나왔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기차에 탔다. "아저씨, 이거 송추가는 거 맞아요?" "그럼요. 어서타세요." 역장아저씨의 사람좋은 웃음. 편지에 나오던 경강역의 역장아저씨 같은 웃음. ^^

 

휴우. 1분만 늦었다면 타지 못했을 것이다. 한숨 돌리고 기차 안을 살펴봤다. 기차라고 하지만 지하철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다른 기차와는 달리 지하철처럼 좌석이 서로 길게 마주보고 있었다. 우리 빼곤 승객한명 없는 평일 오후 기차 안. 봄햇살 처럼 따사로이 내리쬐는 가을 볕을 받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느긋함. 좋다. 기차 타기 전 산 호도과자를 먹자 내 마음은 어느새 소풍가는 유치원생이 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느긋했다. 잠시 후 송추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고생시작이었다. ㅠ.ㅠ 송추에 내리기 고대에서 흔히 보던 표지판이 있었다. 각 학교에는 정해진 이미지가 있다. 학교 로고나, 서류, 혹은 학교내 건물 안내판이나 표지판 같은 것들은 다 정해진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려대학교라는 글씨도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학교 고유서체로 쓰여진 것이다. 종생관에서 파는 학교 기념품 역시 즉흥적 창작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 규격에 맞춰 탄생된 것이다. 연세대나 서울대, 이대역시 마찬가지다.

 

그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다. 건물 하나가 보였다. 건물 앞, 빨래줄에 걸린 야구복들을 보니 야구부 숙소 같았다. "저기 야구부 숙소 맞나요? 고대신문에서 왔는데." 1층 식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곳이 야구부원들이 쓰는 건물임을 알았다. 벌써 KOREA UNIV라고 새겨진 새하얀 야구복을 입고 있는 선수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점심도 안먹고 그곳에 찾아간 우리에게 그 자리에 있던 코치 선생님께서 점심먹고 취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선수들도 이제 막 점심을 먹은터라 조금 뒤에 운동이 시작하니 시간 여유는 있을 것이라고. 식당 아줌마께서 국수를 주셨다. 국수가 담긴 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아서 김치와 같이 맛있게 먹었다. 연수관 밥 참 맛없다고 선수들은 그러지만 난 먹을 때마다 맛있는 걸. ^^

 

국수를 먹고 있던 중,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야구부 선수들이 국수를 먹고 있던 우리를, 낯선 이방인 보듯 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 익숙한 나,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니? 라는 의미의 시선한번 쏘아주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처음 연수관에서 밥 먹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 한번은 밥먹다 성질나서 식판 던지고 학교 간 적도 있었는데. ^^;;;

 

훈련 때 먹을 물을 준비하는 선수들. 1학년인 듯 싶었다. 정수기 앞에 앉아서 물통에 물을 넣고, 그곳도 모자라 얼음까지 넣는다. 그걸 다시 낑낑대며 들고 간다. 주전자라고 불리는 그들. 1학년만 할 수 있는 일. 훗. 웃음이 나왔다. 내년이 되면 또다른 1학년들이 저 일을 하겠지? 반복. 순환. ^^

 

국수 한 그릇 다 먹고 물을 먹는데 코치 선생님이 내게 농담을 던지셨다.

 

"고대라고 했지? 어디 학교에 괜찮은 애 없나?"
"네? 그건 왜요?"
"잉. 우리 제자 중에 잘생긴 놈 있는데 이쁜 고대 여학생 좀 소개시켜줄려고."
"아, 누구요."
"이놈아, 커피 고마타고 일루 와봐라."
"선생님, 왜 그러세요."
"일루와바라. 야 어떠노? 잘생겼쟤? 이 놈아 이름이 문기다. 조문기. 아나?"
"아, 잘 모르겠는데... ^^"
"야를 몰라? 야 유명한데. 진짜 몰라?"
"아... 알아요. 유격수죠? 알아요. ^^"
"맞다. 아네. 야. 니 진짜 유명하네. 니 자들 줄 후식 좀 만들어라."
"뭐요? 아, 말 많네. 저기 녹차 있잖아. 저거 타서 내줘라."

 

3학년이 참 녹차 심부름까지 해야하고. 저 어색한 웃음은 분명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상황 때문에 나오는 것이겠지? 나한테까지 속일 수는 없지. 아니 저 사람 녹차에 설탕을 타네? 아니, 그런데 설탕이 좀 많이 들어가는 거 아냐. 흐음. 아니나다를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치 선생님 한 말씀 하신다.

 

"야야, 녹차에 슈가를 타는 놈이 어딨어!"
"왜요? 이거 타면 맛있던데."
"아니라니까. 촌티나게 놀구 있네. 학생, 학생도 녹차에 슈가 타요?"
"네? 아... 아뇨... ^^;;"
"이놈아, 봐라. 녹차에 슈가 타는 놈이 어딨냐? 어디가서 고대 야구부라고 하지 마라. 다 너 놈같이 촌쓰럽게 노는 줄 안다. "
"네."

 

선생님의 슈가라는 발음이 웃겨서 입을 가리고 쿡쿡대는데, "드세요." 하며 녹차타던 청년이 쑥스럽게 녹차를 낸다. 마셔보니, 음. 설탕을 타니 좀 색다른 맛이 난다. 달짝찌근한 녹차. 나름대로 맛있었다. 선생님께 맛있다는 말을 하려는데...

 

"음. 슈가를 타도 맛 괜찮네." 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다시 또 웃음이 쿡, 나온다. ^^

 

국수에, 녹차에, 수분을 많이 섭취해서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은 금녀의 집 아닌가. 여자 화장실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냥 남자화장실에 쓱 들어가는데, 이런, 화장실에 누가 있었다.

야구복을 입고 볼일을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수. 야구복 입고 볼일 보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잠깐 주춤하다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 선수는 분명 그 주춤하는 시간에 저 여자는 왜 안나가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짜증을 냈을테지.

 

화장실을 나오던 그 선수랑 눈에 마주쳤다. 쑥스러운 표정과 민망스런 웃음을 동시에 짓고 있다. 쿡. 역시 또 웃음이 나왔다.

 

송추에서의 취재가 웬지 재밌을 것 같다는 예감. 반나절 동안 또 무슨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 장비를 챙기고 야구장으로 나갔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첫번 째 기억. 송추에서 보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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