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ers

블로그 기자가 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천수에 대한 단상

헬레나. 2007. 2. 7. 16:53

 잠자리에 들면 도저히 새벽 5시에는 못 일어날 것 같아 꼬박 밤을 새버린 내게 이천수의 프리킥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과도 같았다. 선물을 받기 위해 밤까지 샌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건네주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 말이다. 이천수를 보며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혼자 중얼댔다. 결국 보란 듯이 해냈구나. 넌 그런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고. 영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어때? 당신들, 이제 후회하게 됐다고 말이야.

 

 사실 2002년 월드컵 때까지 난 이천수를 비호감으로 생각하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1999년 가을로 기억한다. 당시 안양LG와 고려대 사이에서 서로 이천수를 데리고 가겠다고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났다. 원래 이천수는 박용호와 함께 고려대로 가기로 봄부터 진로가 결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박용호는 고려대 합숙 중 짐을 싸고 안양LG 구리숙소로 갔다. (최태욱 역시 연세대로 가기로 한 결정을 번복하고 함께 안양LG에 입단했다.) 이천수는 혼자 팀에 남았다. 그러나 고민이 컸던 듯하다. 갑작스레 팀을 이탈하고 사라졌으니. 행방이 묘연했던 그는 몇 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나타났다.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던 그 시절, 아픈 아버지의 수술비를 대준 조민국 선생님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은 고려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당시 이천수의 집은 어려웠다. 이천수의 집안사정이 어려웠다는 사실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 남이 쓰다버린 축구화를 주워서 신고 구멍 꿇린 양말을 신으며 그렇게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그러나 이천수는 한 번도 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동료들은 ‘이천수 표 자존심’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동정 받을 바엔 차라리 죽는 걸 택했을 아이라고 지금도 회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존심 덕분에 그때의 이천수는 흔들리지 않고 축구선수로서 자랄 수 있었고 지금의 이천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축구부 회비를 낼 수가 없어 집안이 넉넉한 동료 아버지가 대신 내줄 때가 많았지만 경기만 나가면 날아다녔으니까. 다들 이천수의 드리블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축구선수가 축구장 안에서 최고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천수는 그 시절을 이겨냈다.

 

 고려대학교를 선택하며 이천수 스카우트 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해 이천수는 시드니 올림픽 최연소 멤버로 발탁되고 국가대표 명단에도 이름을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대학에 입학했다.

 

 2001년 5월이었나. 대학부 춘계야구대회 취재 때문에 동대문야구장에 갔다. 정오였다. 세상에나. 무슨 날씨가 그렇게 더웠는지.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풋내기 대학신문사 수습기자인 나로선 기자석이 어딘지 모르겠고 그냥 3루 쪽에 앉아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 라고 묻는 표정을 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천수였다. 이상하다. 나는 저 사람을 알지만 저 사람은 날 모를 텐데. 왜 나를 부르지?

 

 “저요?” 라고 되묻자 이천수는 “그래, 너.” 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으니.

 

 “그런데 전 왜 불렀어요?”
 “너 고대생이지?”
 “네.”
 “몇 학번이야?”
 “01학번이요.”
 “근데 왜 선배보고 인사 안 해?”
 “누군지 모르는데요.”
 “나 몰라?”“아니, 아는데. 저를 모르시잖아요.”“그래도 후배면 선배한테 인사해야지.”
 “...”
 “다음부턴 인사해라. 더운데 이거 먹으면서 경기 봐. 안 그러면 더위 먹어.”

 

 그러면서 건네준 아이스크림 더위사냥. 한 입 베어먹는 순간 혀끝에 닿던 커피 샤베트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해 여름, 참 지겨울 만큼 이천수를 만났던 것 같다. 응원단 기수부가 하고 싶다고 매일같이 운동장에서 훈련이라는 걸 받았는데 학교에 운동장이 하나뿐이라 축구부와 함께 운동장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천수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어른들 표현에 따르자면 참 ‘독한 놈’ 이라는 사실을.

 

 혼자서 폐타이어를 온몸에 꽁꽁 묶은 채로 뛰는 것으로 모자라 하루 훈련이 끝났다며 모두들 숙소로 돌아갈 때도 이천수는 혼자 운동장에 남아 개인운동을 했다. 햇볕만 봐도 현기증이 도는, 30도를 훌쩍 넘는 8월 날씨에도 말이다. 참 징글징글한 놈이었다. 이천수는.

 

 그로부터 꼭 1년 뒤 이천수는 국민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기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태극전사 중에서 영웅이 아닌 선수가 누구였으랴. 기자들 사이에서 취재경쟁이 붙을 수 밖에 없었다. 월드컵이 끝났지만 아직 월드컵 붐은 끝나지 않았고 태극전사 중 아무나 잡고 인터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기사는 1면 감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나’ 가 과연 있었을까. 아무도 아무나는 아니었다. 어느 선배는 김남일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숙소 앞에서 몇날 며칠이고 팔자에도 없는 ‘하리꼬미’ 까지 했다고 하니. 흠. 그와중에 나는 학교 신문에 실릴 이천수 인터뷰 기사를 위해 그에게 1000통이 넘는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일주일 가량 그렇게 하루종일 전화기 앞에 있었다. 어느 날은 음성을 너무 많이 남기는 바람에 메시지가 꽉 차 더 이상 녹음할 수 없다는 멘트까지 들어야만 했다. 종래에는 “난 정말 기자 자질이 없나보다“ 라고 울먹거리며 혼자서 소주 2병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이천수가 한 번 더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순간이 있다. 바로 이천수를 대신 해 수강신청을 해줬던 날이다. 울산현대에 입단하고 나서 휴학 신청을 했던 이천수가 다시 복학을 했는데 대신 수강신청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갑작스레 짐을 안게 되었다. 분명 짐이었다. 그래도 등록금까지 냈다는데 수강신청은 해줘야지. 투덜대며 학사지원부에 가서 수강신청 확인서를 제출했다. ”이천수 선수랑 무슨 관계죠?“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네? 그냥, 그냥 아는 사람이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직원은 다시 물었다. ”혹시 여자친구세요?“ "아니요.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그냥 해주세요."

 

 당시 수강신청을 해주던 내 기분은 정말 처참했다. 인터뷰 요청을 거절도 아닌 묵살해버린 사람을 위해 수강신청까지 해주는 수고를 하다니. 그렇다고 고마워할까? 분명 아닐 거다. '그저 어떤 사람이 대신 수강신청을 해줬구나' 라고 아주 잠시 기억했다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이 고생을 해야만하다니! 만약 그때도 댓글이라는 문화가 있었다면 ‘난 분명 이천수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라고 댓글을 달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천수를 다시 보게 된 건 2006년 봄, K-리그를 취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군 경기를 취재하러 갔던 경기장에서 선수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천수를 칭찬했다. “열심히 하면 통할 수밖에 없어.”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야. 꾸준히 노력한다면 인정받을 거야.” 이천수가 2군 선수들을 만날 때면 늘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이천수 정도의 레벨인 선수들이면 2군 선수들은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노는 물이 다르다는 식이다. 같은 팀 동료지만 동료의식은 없다. 1군과 2군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도도한 학이라도 된 냥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냉정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그랬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땐 그런 식이었다. 그 때문에 몇몇 2군 선수들은 “없는 존재로 취급 받는 게 속상하다. 팀에서 밥만 축내는 사람인 것 같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종종 2군 선수들을 데리고 밥도 사주며 "형도 힘들 때가 있었어“ 라고 격려해주는 이천수의 이야기는 듣는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줬다. '어쩌면 이천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워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동료는 내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천수가 인터뷰 못해준 거 미안했대. 근데 그때는 너무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하자고 달려드는 상태였는데 아는 사람이라고 해줬다간 다른 기자들도 다 해줘야하니까 결국은 그렇게 너 연락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대.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고. 천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억력이 좋은 이천수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월 이천수의 위건 행이 임박했을 무렵 무작정 울산까지 찾아갔던 날도 그는 웃으면서 나를 기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7년을 지켜본 선수였다. 그날 다시 만난 이천수는 분명 달랐다.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걸까? 한때 팀 동료들은 이천수에게 ‘자신감과 자만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선수’ 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날 만난 이천수에게선 그 모습이 읽혀지지 않았다. 조금은 다급해보였고 또 무척 간절해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외진출을 이루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몸값을 깎으면서까지 나가고 싶다고? K-리그에서 이천수가 받는 연봉과 수당이 얼마인지 아는 나로선 모험을 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궁금했다. K-리그에서 대우받으면서 뛰다 은퇴하는 게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보장 받는 삶이 분명할텐데. 도대체 왜 어려운 길을 택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행여 실패라고 한다면? 그럼 그때는? 

 

 이천수의 대답은 오직 하나였다. “꿈을 위해서.”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품어온 단 하나의 꿈. 넓은 세상 큰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꿈. 바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천수는 지금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지난 2003년 프리메라리가에서 품은 그의 꿈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로 꿈이 산산이 박살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천수는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설령 누군가에게는 풍차를 향해 달려들던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보일 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달리겠다고 했다.

 

 사실 앞일에 대해 섣불리 재단하고 실패가 두려워 도전 자체를 포기하는 내게 이천수의 도전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노력을 기반으로 한, 땀이 서려있는 도전이기 때문에 그의 도전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렇다. 무엇하다 쉬이 얻으려 하지 않는다. 결실을 얻기 위해 그의 노력은 가히 존경받을만하다. 이천수의 프리킥? 그것 역시 타고난 건 아니다.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프로에 와서도 혼자 매일같이 운동장에 나와 몇 시간씩 프리킥 연습만 했다고 한다. 몇몇 후배들이 따라하다 지쳐 잔디에 드러누울 때도 이 독한 선수께서는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단다. 그의 그림 같은 프리킥은 결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어려웠던 옛 시절을 잊지 않는 그 마음이었다. 낡은 이불 위에서 잠을 자는 고대축구부 후배들을 위해 보송보송한 오리털 이불 세트를 가져다주었는가 하면 어려운 형편 때문에 학업의 길을 잠시 접은 친구,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오프 시즌 때는 조용히 고아원에 다녀온 적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그만큼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네 세상은 그 넘치는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던가.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기에 이천수의 기부와 선행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천수는 위기와 시련을 기회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천수가 보여줬던 통쾌한 프리킥은 피곤함마저 날려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와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다. 그러나 이쯤에서 접고자 한다. 앞으로 펼쳐질 축구선수 이천수로서의 삶이 ‘to be continued’ 때문에 못 다한 이야기 역시 지금은 'to be continued'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