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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 넘겠다" 올림픽대표팀 한일전 수문장 정성룡 인터뷰

헬레나. 2006. 11. 16. 04:45

 

 

 

 한일전을 앞둔 13일, 창원의 바람은 차가웠다. “춥죠?” 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괜찮아요?” 라는 인사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전날 열렸던 수원과의 플레이오프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언제까지 그 게임만 생각할 수 없잖아요. 수원에게 진 건 마음 아프지만 이제 다음을 준비해야죠. 물론 아쉬운 마음은 있어요. 아직까지 한 번도 우승이란 걸 해보지 못해서 욕심은 있었어요. 작년 2군리그에서도 4강에서 떨어졌거든요. 그렇지만 올해 처음 1군에서 뛴 거잖아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에요.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참 무던한 사람이다. 정성룡은. 쉬이 기뻐하지도, 또 슬퍼하지도 않는다. 어쩜 굴곡 많은 삶에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도 알 것이다. 살아온 날들 가운데 쉬운 길이란 결코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고등학교 마치고 포항에 왔을 때만해도 2군에서 게임 뛰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김)병지 형이랑 (조)준호 형도 있었고, 저까지 합해 골키퍼가 5명이나 있었거든요. 전 그저 형들 게임하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사실 그가 인내할 수 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가 원래는 스위퍼였는데 중2 때부터 골키퍼로 뛰었거든요. 그때가 마침 프랑스월드컵 기간이었는데, 네덜란드전에서 보여줬던 병지 형 모습에 반했어요. 우리나라가 5대 0으로 졌지만 형의 움직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그 후 제주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제주도에서 잉글랜드와의 친선경기가 열렸어요. 그때 볼보이한다고 골키퍼 뒤에 있었는데 그 골키퍼가 병지 형이었어요. 평소 존경하던 선수가 바로 제 옆에서 뛰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다고 다짐했죠. 열심히 해서 꼭 형처럼 국가대표 골키퍼가 되겠다고 제 자신과 약속했어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형이랑 같은 팀에서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그게 더 운동에만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됐고요.” 

 

 

 

 그리고 포항에 입단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아테네올림픽대표팀 예비멤버로 발탁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신은 가혹히도 그에게 잠시 쉬라 말하였다.     

 

 “소집 첫날이었어요. 연습 도중 다이빙까지는 좋았는데요. 그때 바닥에 깔린 잔디가 안 밀리는 잔디였던 거예요. 그 바람에 접질렸죠. 결국 어깨탈골로 수술까지 했고요. 다시 운동하기까지 넉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정말 많이 속상했죠.”

 

 혼자서 눈물을 삼키진 않았나요? 그랬을 것만 같아요.
 잠깐의 침묵 뒤에 그가 되물었다. 눈물이요?  
 

 “원래는 많았어요. 음… 많았는데…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그날 다 운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젠 눈물이 안나요. 중학교 3학년 때 서귀포고등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어요. 저 혼자 제주도로 갔어요. 부모님은 분당에 계셨고요. 그런데 제주도 간지 얼마 안돼서, 그러니까 막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였어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따라 갔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하시더니 저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시더라고요. 음… 원래 몸이 안 좋으셨는데… 갑작스럽게… 그렇게 떠나셨어요. 그날 병원 뒷길에서 엉엉 울었어요. 한참 울다 이제 내가 가장이니까 강해져야겠다. 성공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프로 갈 때만해도 계약금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계약금 받은 걸로 어머니께 집도 사드리고, 빚도 갚았어요. 음… 그렇지만 그걸로 효도했다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거든요. 늘 제 뒷바라지만 하셨어요. 그런데도 전 항상 제 생각만 했고요. 용돈 달라고 떼도 많이 쓰고. 그렇지만 저희 어머니는 참 강한 분이세요.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요.”

 

 어머니와 축구만 생각했다. 그라운드에 설 날만 기다리며 기도했다. 그리고 지난 5월 22일 경남전, 오랜 기도는 끝났다, 정성룡은 프로 입단 3년 만에 무실점이라는 깔끔한 기록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항상 준비는 하고 있었어요. 기회는 오니까. 그런데 자주 오지 않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매일 준비하며 기다렸어요. 기분이요? 그냥 덤덤했어요. 아직 더 많이 경험을 쌓아야 하잖아요. 좋아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반가운 소식은 연이어 배달됐다. 베어백 호 1기에 발탁됐고, 도하 아시안게임 최종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냐고 물어봤다. 김영광과 김용대의 이름을 꺼내자 무슨 뜻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A매치 뛰고 싶죠. 진짜. 뛰어보고는 싶지만 무슨 일이든 쉬운 건 없잖아요. 조금 더 노력하고 기다려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에 대표팀에 있으면서 쟁쟁한 선배들 밑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언젠가는 제게도 기회가 오겠죠. 어떻게 보면 아주 큰 경쟁의 장이잖아요. 그 경쟁 속에서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어야죠.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또 과감하게.”

 

 다음날, 정성룡은 올림픽대표팀 한일전에 선발로 출격했다. 비록 자책골로 1-1 무승부로 끝났지만 경기 내내 보여준 그의 선방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날 대표팀 2인자 정성룡은 없었다. '1' 이라고 크게 적힌 등번호가 어울리던, 듬직한 수문장 정성룡만 있었을 뿐이다.

 

 “열심히 했어요. 경기 내용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비겨서 아쉽긴 하지만 아쉽다고 그 경기만 생각할 순 없잖아요. 이제 또 다음을 준비해야하죠. 앞으로도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시안게임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릴게요. 그땐 지금보다 더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