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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리그 결승골의 주인공, 인천UTD 미소천사 박승민

헬레나. 2006. 10. 27. 09:48

 

 

 

 “진짜 오랜만에 넣은 골이라 정말 좋았어요. 컵 대회 울산과의 경기 때 (5월 20일) 골을 넣고 그동안 계속 못 넣었거든요. 골 넣고 나서 아주 잠깐 세레모니를 할까 고민했는데, 그 순간 다들 저한테 달려와서 안기더라고요. 그래서 못하고 넘어갔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아쉬워요. 그냥 할 걸 그랬어요. ‘한골 더 넣어서 꼭 세레모니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결승골인 줄 알았으면 아, 진짜 했을 텐데. (웃음) 아쉽네요.”

 

 박승민. 그가 웃었다. 참 오랜만에. 물론 인천도 함께 웃었다. 인천은 전반 13분 터진 박승민의 골을 끝까지 지켜내 2006 2군리그 우승컵을 가슴에 안았다. 창단 이래 첫 우승이었다.

 

 “제가 잘한 게 아니에요. 다 (이)근호가 어시스트를 잘해준 덕분이에요. 사실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전날 광주에서 1군 경기가 있었잖아요. 그날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서 뛰고 거기서 하루 잤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KTX 타고 인천에 왔는데, 오자마자마 바로 또 뛴 거예요.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우리 팀이 우승하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했는데, 지금 잠깐 힘들다고 안 할 수 없잖아요. 저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으로 뛰었는데 이렇게 원하던 결과 얻게 돼서 무척 좋아요.”

 

 1대 0으로 부산을 눌렀다. 그러나 인천을 응원하며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 순간도 몇 차례 있었다.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이 없었다면 부산의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만큼 후반전에 터진 부산의 중거리 슛은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저희가 이길 줄 알았었어요. 저희가 얼마나 잘하는데요. 2군 리그에서 진적이 거의 없어요. 경기 내용도 좋았기 때문에 뛰는 내내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저희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다른 구단에 비해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런 거랑 상관없이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다들 열심히 하다보니까 잘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잘된 거라 생각해요. 저희 팀에 어린 선수들 많잖아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개인운동을 하면서 지내요. 저희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노력들이 쌓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해요.”

 

 이것은 곧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난 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그리며 땀을 쏟던 박승민이였으니까. 

 

 “작년에 많이 아팠어요. 프로 들어와서 슬럼프가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그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입단하고 1월부터 운동을 했는데 운동시작한지 일주일 밖에 안됐을 때일 거예요. 그때 팀에서 다 같이 등산을 갔거든요. 갔다 내려오는데 갑자기 무릎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특별히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도 무릎은 계속 아프더라고요. 나중에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무슨 증후군이라던데, 이름도 어려워서 잊어버렸네요. 그게 근력이 약한 경우에 많이 발생하는 그런 거래요. 그래서 5월까지 재활치료를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팀에 복귀했지만 7월까지는 조깅 같은 거 밖에 못했고요. 그때 얼마나 답답했던지. 에효. 몸이 다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운동을 하려니까 마음대로 안 뛰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요. 이게 내 체력의 한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아요.”

 

 먹구름이 그를 덮던 그때, 바로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어려운 순간에도 늘 마음 편히 가지라고 말씀하시던 당신. 바로 ‘아버지’ 라는 이름의 당신.

 

 “항상 그러세요. 심각하게 생각하지마라고. 항상 마음 편히 부담 갖지 말고 축구하라고. 저희 아버지는 지금 부산교통공사에서 감독님으로 계세요. 제가 축구를 하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 때문인 것 같아요. 축구를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저를 기르셨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아주 어릴 때는 그게 가끔 싫을 때가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국가대표도 하셨거든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는 잘하셨는데, 하면서 참 많이 비교했어요. 어린 마음에 그땐 그게 참 싫었어요. ‘나는 그대로의 난데 왜 자꾸 아버지랑 나랑 비교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거기다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 밑에서 축구를 했어요. 그거 때문에 경기 못 뛰는 선수들에게 시샘도 받아보고 그랬어요. 수군거림도 있었고요. 진짜 잘해야 본전이고 그랬어요. 가끔 애들이 아버지 욕하는 것도 들었고요. 그때마다 별로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그래도 어릴 때니까 가슴 아프잖아요. 속상한 마음에 싸움도 붙어보고 싶고 그랬는데, 결국엔 다 참았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감사해요. 물론 어릴 때는 정말 몰랐죠. 아버지가 제 축구인생에 참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 사실을요. 아버지 덕분에 축구 기술 뿐 아니라 정신력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박승민의 축구인생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명 더 있다. 바로 그의 형 박혁순(광주상무, 26세)이다.

 

 “어제(25일) 광주전 때 형이랑 같이 뛰었어요. 제가 교체로 들어갔잖아요. 제가 교체 돼서 들어가자마자 골이 났어요. 그때 형이 긴장하지 말라고 골 먹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침착하게 하라고 경기 중에 제게 말했어요. 고마웠죠. 그리고 나서 형이랑 맨투맨으로 만났어요. 형이 사이드에서 치고 달리면 제가 막고 그랬어요. 중간에 페인팅에 속아 못 막을 때도 있었지만. (웃음) 나중에 게임 끝나고 형한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나한테 고마운 줄 알라고. 중간에 헤딩 따내려고 붕 떴던 순간이 있어요. 그때 형이 앞에, 제가 뒤에 있었는데 그때 평소 하던 대로 하면 형이 다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럼 안 되니까 옆으로 돌아서 헤딩했죠. 그 얘기를 했더니 너는 나한테 그 소리 하면 안 된다고 형이 바로 반박하더라고요. 제가 왼발로 슈팅할 때 형이 앞에 있었거든요. 형 말로는 몸으로 막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 안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슈팅이요? 옆 그물에 맞았어요. (웃음)”

 

 분명 2006년은 박승민에겐 잊을 수 없는 한 해 일 것이다. 프로 데뷔전도 치렀고, 데뷔골도 기록했다. 선발출장의 긴장도 느껴봤고, 교체로 뛰는 순간의 압박 역시 겪어봤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승골로 팀에 우승컵을 안겨준, 그동안 늘 꿈꾸기만 했던 영웅도 돼봤다. 하나하나 헤아려보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기에 아마 더 잊을 수 없으리라.

 

 “그래도 지금 이것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항상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려고요. 준비되지 않은 자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어요. 자신감이 없으면 좋은 플레이가 나올 수가 없고요. 나는 잘하고 있다. 단지 운이 안 따를 뿐이다. 열심히 하면 운도 함께 따를 것이다. 늘 이렇게 암시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씩 1군 출장 횟수도 늘리려고요. 대표팀도 한번 가보고 싶고요, 올스타전도 꼭 뛰어보고 싶어요. 저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 노력하면 이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하나 조금씩 하려고요.”

 

 마지막으로 그는 경기장을 나서는 순간까지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K-리그가 별로라는 이야기를 가끔 들어요. 누군가는 그걸 선수들이 재미없는 축구를 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경기운영능력 부족이라고 지적해요. 연맹의 행정이나 구단의 마케팅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렇지만 전 비관적으로 보지 않아요. 문제란 누구에게나 또 어디에서든지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문제들을 하나씩 바뀌면 된다고. 모자란 부분들은 채우면 되고요. 듣고 나서 흘리는 게 아니라 하나씩 고쳐나가다 보면 결국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희 서포터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프로에 와서 서포터들이 응원하는 거 볼 때마다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작년에 저희 서포터즈가 상도 받았잖아요. 다른 팀과 비교했을 때 저희 서포터즈는 인천이라는 팀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무척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저의 첫 프로생활을 이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요.”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인천에서 당신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하노라. 그리하여 행복하노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