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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의 부활, 그 뒤에 숨은 눈물

헬레나. 2007. 6. 28. 15:33

 

 안티요? 많이 늘었죠
 김영광 선수는 담담했습니다. 어쩜 애써 감추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대표팀 탈락이라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위에서 (정)성룡이 같은 경우는 올림픽 2차 예선 앞두고 경험 삼아서 가는 거니까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네가 못해서 안가는 게 아니다. 그런 말씀해주니까 저한테 힘이 되죠. 네가 못해서 못가는 거다. 그러면 많이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저를 믿어주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지금의 상황, 이젠 정리해야죠.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만 하려고요.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한번은 쉬어가라. 그런 생각으로 이겨내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김)병지 형도 그랬고, (이)운재 형도 그랬고, (김)용대 형도 그랬고 다들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요. 그 시기를 거친 뒤에 올라설 수 있었잖아요. 저도 극복해야죠. 앞으로 축구는 10년 이상 더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는 언제든지 올 거라 생각해요. 팀에서 더 잘하는 모습 보여준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다시 오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처음엔 쓰렸겠죠. 누구보다 욕심 많은 사람이니까요.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만큼 노력했죠. 그 이유 때문이더라도 근래 맛본 실패는 꽤나 썼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좀 운동에 많이 집중에 못했던 게 사실이에요. 딴 쪽에 많이 빠져있었죠. 축구 열심히 한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 집중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여자친구와도 헤어졌어요. 여자친구 있다고 축구를 못하는 건 아닌데요, 당분간은 축구 하나만 생각하고 싶어서요. 독하게 마음먹었어요.”


 

 독한 마음을 품기까지 지난 한해 얼마나 많이 좌절하고 절망했던가요.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김영광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꼬일 데로 꼬인 한 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2006년도는 모든 게 다 꼬였어요. 초반에 대표팀 전지훈련 가서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안 좋았어요. 팀에서는 경기도 못 뛰었죠. 그러다 대표팀 가서는 이상한 짓 하고… 2006년 한 해 동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작년에 이란전도 그래요. 잘하긴 잘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상황에서 (김)상식이 형이 한 번에 걷어냈다든지, 내가 잡았다든지, 그대로 흘러가서 골만 안 먹었어도 아무 문제없는 거였는데, 그게 그냥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뭐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꼬이니까 다 꼬이더라고요. 그때 그 심정 아무도 모르고. 어찌나 답답하던지… 대표팀을 안 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나가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답답했어요. 못하겠더라고요. 팀에서도 경기를 못 뛰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없었어요. 작년에 전남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대표팀에 가서 뛰었단 말이에요. 경기력이 나오겠어요? 제가 해본 결과 잘할 수가 없어요. 순간적인 판단력 같은 게 조금씩 흐트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안티도 많이 늘었다고 하네요. 개인 블로그에다 심한 말을 쓰고 가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이지만 처음엔 작은 비난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상했던 건요, 기자들이 그냥 마음대로 저에 대해 쓴 거였어요. 처음엔 나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김영광이 밀렸다는 둥 슬럼프에 빠졌다는 둥 다들 그렇게 기사를 쓰시니… 후… 괴로워서 한숨만 나오더라고요. (박)주영이 같은 경우도 한순간에 띄웠다가 한순간에 막 죽였다가. 그래버리면 안돼요. (김)병지 형도 지금은 아주 듬직하게 잘하시잖아요. 예전에도 잘했지만 중간에 그러지 못하던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병지 형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기자들인 것 같아요. 실수했어도 한번쯤은 그 실수를 덮어주고 그래야하는데 한번 잘하면 잘한다 했다가 못하면 못한다 했다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믿는만큼 선수들은 더 올라갈 수 있는 법인데… 물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선수들은 괜찮아요. 그렇지만 예민한 선수들은 그런 기사 보면 어쩔 줄 몰라 해요. 그저 속만 답답하죠. 문제는 그 상태가 경기장 가서도 연결된다는 거예요. 서로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는 거 알지만 선수 입장에서는 좀 많이 아쉽죠.” 

 

 골키퍼가 되기까지

 “원래는 공격수였어요. 그런데 너무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뒤에서 공이나 주우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축구가 너무 좋아서 뒤에서 공 주우면서 축구부에 있었죠(웃음). 그때가 5학년 때였는데 한번은 골키퍼가 다친 거예요. 골키퍼 볼 사람이 없으니까 저한테 해보라고 시켰어요. 신체조건이 제일 좋았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다이빙 떠본 적 없던 제가 앞에서 공이 날아오니까 다이빙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감독님께서 몸을 날리면서 잡는 제 모습을 보시더니 내일부터 당장 골키퍼 옷 입으라고 하시더라고요. 다음날부터 정말 죽는 줄 알았죠. 초등학교 때가 이제껏 운동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들었어요. 여름에는 위에 4벌, 아래 4벌 입고 뚱뚱해서 몸도 안 움직이는데 2~3시간 씩 운동했어요. 만날 울고 만날 코피 터지고. 그래도 그만두겠다는 말은 절대 안했어요. 오기가 있어 가지고요.”


 물론 그 오기 안에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영광은 없었겠죠.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열심히만 하면 꼭 대표 선수로 만들어주겠다고. 좋은 신체조건을 타고 났으니까 아무 말 없이 힘들어도 참고 따라 와주면 분명 대표팀에 들어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진짜 힘들어도 ‘나는 대표팀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코피 흘리면서 했죠. 그래서 정말 골키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유소년 대표가 됐어요.”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다이빙을 하루에 100개 씩 했거든요. 그것도 맨 땅에서요. 그래서 이런 데 보면은 살이 다 가죽같이 됐어요. 만져 보실래요?”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팔꿈치와 무릎을 만져봤습니다. “가죽 같죠? 살이 다 굳어서 가죽처럼 돼버렸어요. 부딪혀도, 밀려도 까지지가 않아요. 하하하.”

 

 이제는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웃음 뒤에 뿌렸을 눈물이 생각나서, 열 두 살의 김영광이 떠올라서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웃습니다. 워낙 성격이 밝은 탓이겠지요.

 

 “그렇게 열심히 하고 나서 대회에 나가니까요, 막 날아다니더라고요. 진짜 제 앞에 오는 공은 거의 다 막았어요. 결국 전국대회 우승까지 했죠. 그러면서 제 이름이 알려졌고 그 이후에 대표팀에 뽑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누구라도 그때 제가 했던 만큼 운동했다면 어떤 골키퍼든지 대표팀에 뽑혔을 것 같아요. 정말 독하게, 또 정말 심할 정도로 많이 운동했거든요.”

 

 골키퍼의 애환
 “외롭잖아요. 골키퍼는. 운동할 때도 다른 선수들과 달리 따로 운동해야하고 경기장에서도 혼자 서 있어야해요. 공이 매번 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느 때 올지 모르니까 90분 내내 공만 바라봐야해요. 게다가 끊임없이 수비 위치도 잡아줘야해서 계속 고함 질러야하고요. 그래서 경기 끝나고 나면 항상 머리가 아파요. 집중하고 있다 긴장 풀리면 머리가 띵해지잖아요. 두통 때문에 다음날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아요. 게다가 경기 내내 악을 질렀으니 목도 엄청 아프고요. 골키퍼 진짜 백날 잘해도 하나 실수하면 끝이잖아요. 엄청 잘하다가도 하나 이상하게 개발 잡고 먹히면 평생 따라다니잖아요. 공격수들은 못해도 하나만 잘하면 잘한다고 그러지만요. 이게 참 불공평한 것 같지만 그래도 골키퍼라는 자리는 참 매력 있어요. 어려운 골을 막았을 때 동료 선수들한테 자신감도 실어주고 할 수 있다는 파이팅도 불어넣어주고. 그런 게 좋아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었습니다. 골키퍼로 뛰면서 언제나 가장 힘든지, 혹은 속상한지에 대해서요.   

 

 “경기 중에 저를 향해 심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한번은 교복 입은 어린 여학생이 저한테 욕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또 한 번은 어떤 분이 ‘그따위로 하니까 대표팀이나 짤렸지. 정신 차리고 군대나 가라’ 하시더라고요. 정말 속상했어요. 그래도 저는 90도로 인사하면서 그냥 흘러 보냈어요. 그랬더니 ‘인사 잘하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잘해라. 알았지?’ 하시더라고요(웃음).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런 말 하나 하나에 치우치면 안 되죠. 골키퍼는 냉정한 맛이 있어야해요. 저도 처음에는 냉정심을 갖기가 어려웠어요. 그 때문에 청소년대표팀 시절에 대표팀에서 제외된 적이 있어요. 마지막에 합류했는데요, 그때 박성화 선생님께서 제 성격을 고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점점 발전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한골 먹히면 골대 발로 차고 장갑 집어 던지고 분한 걸 못 참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골 먹어도 덤덤하게 웃을 수 있게 됐죠. 골 먹어도 덤덤하게 빨리 공 주워서 던져줄 수 있으니 많이 바뀐 거죠.”

 그렇지만 그런 김영광이 될 수 있기까지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축구선수라는 꿈을 키우는 아이들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이 많이 물어봐요. ‘형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요. 그럴 때마다 ‘후회없을만큼 열심히 하다 보면 이룰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데요, 제 말을 다 알아듣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모르더라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알겠죠. 그런 아이들 보면요, 정말 고마워요. 대표팀 탈락했을 때도 저한테 쪽지와 메일이 많이 왔어요. ‘힘내세요’, ‘제가 봤을 때 김영광은 최고 골키퍼입니다’ 이런 격려의 글을 보면서 많은 힘을 얻었어요. ‘아, 한명이라도 나를 생각해주는 팬이 있는 한 절대 주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팬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서 다시 대표팀에 복귀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저는 골키퍼라는 제 포지션을 사랑해요. 이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어요. 꾸준히 오래 뛰고 싶어요. 지금 병지 형이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 역시 병지 형처럼 많은 경기에 나서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것보다 나중에 은퇴했을 때 통산 성적에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싶다는 꿈이 더 커요. 아직까지 그런 골키퍼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열심히 해서 K-리그에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컵대회 결승전이라는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있는 상태라 조금은 예민해질 법도 했건만 이렇게 그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며, 또 마지막까지 열심히 대답해줬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김영광 선수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요? 전혀 몰랐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허허 웃으면서 말합니다.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까다롭고 말없고 냉정할 것 같대요. 안 그런데…(웃음).”

 그러고 보면 선입견이란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그와 만나 이야기조차 나눈 적 없으면서 그동안 저는 저의 기준으로 그를 바라보고 재단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날 만난 김영광이라는 사람은 구김 없이 맑게 웃던, 그래서 무척이나 넉살좋고 털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공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된다’는 생각보단 ‘된다’는 생각만 갖던 그의 마음가짐은 다음 말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우승 못하면 어떡하냐고요? 그런 생각 안 해요. 절대 안하죠. 무조건 우승할 수 있다는 생각만 갖고 있어요. ‘만약에 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집중력이 흩뜨려질 수밖에 없어요. 그건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생각하면 되고요 지금은 ‘우승해야한다’,‘우승할 수밖에 없다’,‘우승한다’ 그 생각만 갖고 있어요. 그러니 반드시 우승할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은 곧 현실이 됐습니다. 울산현대는 삼성하우젠컵 2007 결승전에서 전반 3분 터진 양동현의 선제골과 후반 18분에 들어간 박동혁의 결승골로 FC서울을 2-1로 누르며 우승컵을 손에 쥐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감사 기도를 올리던 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습니다.

 

“제가 말했죠? 믿음만 있으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우승이에요. 아, 이 우승컵 안고 잔디 위에 누워버리고 싶어요. 너무 좋아서 울 것만 같아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광 선수는 그렇게 말하며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와 악수를 하면서, 굳은 살이 박혀 딱딱해진 그 손끝에서 저는 김영광 선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의지 또한요. 

 

이 여름이 지나면 그는 또 훌쩍 자라 있겠지요. 결실을 맺을 그의 가을을 조용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