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ers

안녕, 제주소년

헬레나. 2007. 7. 19. 15:47

 

 "점심 먹고 취재하세요."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던 중 빈 자리가 보였다. 자리에 앉으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슬쩍 목례를 하던 중, 그 아이를 발견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맞다. 팀을 옮겼지. 이젠 이곳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구나.

 

 작년 봄이 생각난다.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K-리그를 취재하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그때 내 담당 구단이 그 아이가 있던 팀이었지. 처음으로 맡았던 팀이었다. 생각난다. 그 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그때가. 혼자 경기 보고 노트북에 기사 쓰고 집에 오면 뭐가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피곤에 지쳐 잠이 들곤했다. 아니, 지쳐 쓰려진 채 잠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월드컵을 앞두고 남들은 신나라했지만 그 아이가 있던 팀은 조용했고 때론 우울했다. 무승 행진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그 아이가 짠하고 나타났다. 데뷔한지 100일이 안된, 상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아인 든든히 제 몫을 해줬다. 그 아이가 뛰는 모습을 본 첫날, 나는 한번에 그 아이의 이름을 외웠다.

 

 5월이었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비가 내렸다 그쳤고 경기가 끝난 후 트랙에 서 있던 내 곁으로 잔디 냄새가 솔솔 풍기던 그런 날이었다. 그날, 선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준비했는데 경기장에서 선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생각했고 마침 그 아이가 내 앞을 지나갔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이것 좀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키가 너무 커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한참이나 올려야만 했다. 키가 큰 나무 같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그러고보니 그 나무가 잔디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던 날도 생각난다. 전북전이었을 거다. 자신이 내준 페널티킥 때문에 이긴 경기를 비겼다며 그 아이는 서포터스에게 인사하는 순간까지 고개 숙인 채 울었다. 1년이나 지났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때 이야기를 꺼내자 땀까지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란. 하지만 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여름이 끝날 무렵 올해를 빛낼 유망주로 선정돼 그 아이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생겼다. 애석하게도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인터뷰를 하지 못하게 됐지만, 만약 그때 인터뷰를 했다면 그 아이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기자님, 명함 있어요? 하나만 주세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은 평화로웠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편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날의 만남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다음에 만나면 늘 만나던 사이처럼 "안녕! 잘 지냈어요?"라고 인사해야지. 시즌이 끝나기 전에 꼭 다시 경기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야지. 비빕밥을 다 먹을 때까지 내 앞에 앉아 있어줬던 그 사려깊은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개구리들의 합창소리를 들었다. 내 마음까지 정화시켰던 맑은 소리란.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래서 짐작에 불과하지만, 제주의 자연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맑은 것이라고 확신해본다. 

 

 안녕, 제주소년. 빨리 나아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당신이 뛰는 모습을 보고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