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2002년 마지막 데이트

헬레나. 2003. 1. 2. 16:47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게됐다. 약속시간에 늦을지도 몰라 모닝콜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일어났어? 빨리 준비하고 나와, 라고 말하는 그 사람. 잠에 취한 목소리로 응, 이라 대답했다.오른쪽 뒷머리가 살짝 뻗쳐 한참을 드라이하고선 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만나기로 한 역이 나왔다. 지하철 창문 너머 그 사람이 보였다. 빨리 타라고 손짓했다. 머리 많이 자랐네? 나를 보자 하는 첫 마디. 웅, 많이 자랐지? 라며 웃었다. 조금 더 기르고 파마 하려고. 어떤 파마가 어울릴까?

 

삼성역에 내렸다. 메가박스에서 2시 10분에 하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을 보기로 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오후에 메가박스 오기는 참 오랜만이다." 라고 말하는 그 사람.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여긴 정말 연인들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러게. 우리도 남들이 보면 그렇게 오해할까?"
"훗. 그럴지도. "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1년만에 보는 해리는 참 많이 자라있었다. 통통했던 볼살도 빠지고 시종일관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로 대사를 읊었다. 해리와 키가 비슷했던 론은 어느새 한뼘이상 차이 나도록 자랐고, 헤리미온느의 눈빛은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어찌나 뇌쇠적이던지. ^^ 가장 놀랐던 것은 말포이. 말포이의 느끼함은 절정에 다달았다.

 

역시 난 해리포터 타입인가보다. 반지의 제왕2편은 1편만큼 재미나게 보지 못했지만 해리포터 2편은 1편만큼 재밌게 봤다. 중간중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가 좀 컸던 까닭에 옆에 있던 그 사람은 영화보는 내내 민망해했다. 하지만 무서운 걸 어떡해. ㅠ.ㅠ

 

정의를 위해서,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호그와트 학교를 위해서, 죄없는 한 사람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이런 이유로 론의 동생 지니를 구하러 가는 해리포터. 하지만 그 상황에 놓인 여자라면 그에게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자신인 호그와트의 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일지라도. 괜찮냐며 손을 잡아주는 그 손을 아마 절대 놓치기 싫을 것. 술에 취한 어느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정신 차리라며 내 손을 잡아주던 그때처럼.

 

영화를 본 뒤 반디 앤 루디스로 갔다. 피천득의 수필집을 사려고 했으나 그 사람이 찾던 손바닥보다 작은 책자는 절판되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전공서적을 샀다. 전공 서적을 산 다음 함께 그림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가는 길에는 바비인형과 곰인형도 구경했다. 언젠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을 이 사람과 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기분 꽤 좋은데? 왜일까? ^^

 

저녁은 고대에서 먹기로 했다. 요즘들어 학교 참살이길에 있는 리꼬네 스파게티에 반했기 때문에. 입이 싼지 몰라도 스파게티는 음식점에 상관없이 좋아한다. 레꼬네는 우리 학교에서 장사하는 유일한 스파게띠 전문점. 얼마 전 유열 아빠와 같이 크림 스파게티를 먹은 적이 있는데 느끼하지 않아 그때부터 팬이 됐다.

 

"거기서 하는 스파게티가 20가지나 되거든. 그거 꼭 다 먹어보고 싶어."
"스파게티를 좋아하는구나?"
"웅. 요즘은 스파게티가 젤루 땡겨."

 

단체손님이 있어 스파게티가 늦게 나오게 됐다. 주인은 미안하다며 마늘빵을 서비스로 더 줬다. 마늘빵을 먹던 중 선물 생각이 났다.

 

"이게 뭐야?"
"생일선물. 아직 생일 오려면 멀었지만 미리 줄 수밖에 없었어. 뜯어봐."
"밉게 뜯어서 미안. 어? 이거 스노우캣 다이어리네?"
"응. 다이어리라서 빨리 주는거야. 새해가 오면 다른 다이어리 사지 말고 이거 써. ^^"
"그런데 너무 이쁘다. 나 글씨 못쓰는데, 이쁜 다이어리 망칠까봐 겁나네. 아무튼 정말 고맙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잘 써. 내가 만날 때마다 검사할거야. ^^"
"네, 선생님! ^^"

 

스파게티는 비쌌다. 학교 앞에서 3000원짜리 밥만 먹는 나에게는.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12월 30일. 12월의, 또 한해의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마지막 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라고 해두자. 아니 실제로 특별한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먹는 저녁식사니까.

 

길다란 초록 양초는 타오르고 있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잔 속에 담긴 콜라를 와인으로 보이게 만든다. 마실 때마다 느끼는 콜라 특유의 톡쏘는 맛이 없다면 와인으로 생각하며 마셨을테지.

 

"넌 왜 아직도 남자친구 안 만든거야? 너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다 뭐하는데 쓰는건데?"
"다 친구고, 선배고, 후배야. 다들 여자친구 있거나 나름의 작전을 짜서 작업 중이지."
"괜찮은 사람 없어?"
"글쎄다. 딱히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데."
"눈이 까다로운 거니?"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까다롭다면 까다롭다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네."
"어떤 사람이 좋은데?"
"똑똑한 사람. 그렇지만 똑똑하다고 척하지 않는, 지식을 지혜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하고, 사고의 유연성도 있어야겠지. 나의 상처와 단점까지 받아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자신의 꿈을 위해 우직하게 노력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노무현? 우직하다는 말을 들으니 신해철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무현만 생각나네. 하하."
"어쨌건 애석하게도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구나. ^^ 하다 못해 나한테 매번 영화보여주고, 영화보고 돌아오는 길에 여기서 파는 스파게티를 사줘서 결국 20가지 스파게티를 다 먹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면 오케인데..."
"없구나?"
"응. ㅜ,ㅜ"
"다음달부터 고시학원에 가야해서 과외까지 관둔터라 내가 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야, 정말 안타깝다."

"근데 아까 내가 안암역 출구로 올라가던 길에 본 그 사람 있잖아, 몇 살같이 보여?"
"음. 많아 보이던데. 마흔 다 되지 않았어?"
"아냐. 서른 셋밖에 안됐어. 너가 볼 때도 늙어보이는구나. ^^"
"응. 누군데?"
"그 사람? 요즘 신문 만드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데 옆에서 더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있어. 거기다 변태다, 나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어?"

 

한참동안 떠들었다. 그 사람 때문에 짜증났던 이야기들을. 내 이야기를 중간에 막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진지하게 경청하는 이 사람.

 

이번에 나온 신년호를 보여주겠다며 함께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로 가는 길, 12월의 마지막 눈이, 아니 올해의 마지막 눈이 내렸다. 그 눈을 맞으면서 손을 꼭 잡고서 홍보관까지 갔다. 신년호를 손에 쥐어주고 함께 지하철을 탔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기분 꽤 좋은걸?

눈 오는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웃었던 12월 30일의 밤. 나, 데이트를 하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내 오랜 벗과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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