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나는 그녀를 이해해

헬레나. 2003. 5. 13. 13:53

신문사에서 회식이 있었다. 2차까지 갈 줄 알았는데 수습보까지 참석한 자리인지라 민욱이가 돈이 없었나보다. 그 자리에서 다들 헤어져 집으로 갔다. 그러나 나는 집에 가봤자 내 방에서 동생이 과외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시간을 때워야했다. 역시 만만한 곳은 비디오방.

 

안암역까지 마리아를 데려다준 다음, 시네마 천국 비디오방으로 갔다. 마침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하키부 친구 운정이가 함께 탔다. 옆에는 골키퍼 코치님이 계셨다. 비디오방에는 무슨 일로 가냐는 운정이의 물음에 차마 혼자서 영화본다는 말은 못하고, 친구가 기다라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울하구나.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하고.

 

원래는 엑스맨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라 피아니스트, 라는 비디오를 보는 순간 마음이 바꿨다. 석탑 대동제가 시작한 월요일 저녁. 날은 좋고 밤공기는 시원하다. 총학생회 주최의 대동제 개막제가 시작됐고 연인들은 손을 꼭 잡고 구경 중이었다. 그래, 오늘같은 날은 피아니스틀 봐야한다.

 

이 영화는 제54회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와 남우, 여우주연상을 석권해서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동안 깐느 영화제에서 같은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 상을 탄 적이 없었고, 이 의례적 사건 뒤로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남우 주연상과 여우 주연상을 타게 할 수 없다는 새로운 조항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춘의 포스터 이후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라 피아니스트의 포스터. 화장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키스하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모습은 내 머릿 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신문사 일에 치여 겨우 영화 보러 갈 시간을 만들었을 때는 그 영화를 상영 중인 극장은 한 군데도 없었다.

 

빈 음악학교의 교수 에리카. 슈베르트의 음악을 전공한 그녀는 마흔살의 독신여성이다. 아직도 노모와 같이 살고 있다. 그녀의 노모는 집에 늦게 들어올 때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돌아다녔냐며 캐묻는다. 그것도 모자라 가방을 뒤지며, 전화를 걸어 어디 있는지 행방을 묻는 의녀증 환자다.

 

어느 자선가의 집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그녀의 연탄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박수를 치며 부라보를 연발하는 금발의 공대생, 클레메. 공대생이지만 슈베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는 감각만은 뛰어나다. 피아노 건반을 오리락내리락 하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하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듣다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짓는 그녀. 그를 향한 사랑을 예감이라고 한 것일까.

 

피아노를 가르칠 때의 에리카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교수님이다. 그러나 그녀는 수업이 끝난 뒤 들린 섹스샵에서 방금 사정한 남자의 정액이 묻은 휴지에 코를 묻은 채 컴컴한 방에서 포르노를 본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정액을 맡는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멘델스존 음악회 첫 리허설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동차극장에 간다. 카섹스하는 남녀의 모습을 침까지 삼켜가며 보고 있다. 절정에 다달은 모습을 보다 참지못하고 차 옆에서 소변을 보는 일까지 감행한다. 소변을 보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섹스 중인 남녀를 향하고 있다.

 

집에서 그녀는 거울을 이용해 면도칼로 자신의 국부를 도려내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피도 닦지 않고 생리대를 찬 뒤 저녁을 먹고있다. 다리를 타고 피가 내려오자 아무렇지도 않게 쓱 닦고 탁자 앞에 앉는다.

 

그녀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음악 대학원 시험을 본 클레메. 모든 교수들이 그의 연주가 완벽하다며 합격이라고 말하지만 그녀만은 천박한 연주라며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가 제자가 되면, 그 좁은 피아노실에 앉아 함께 있어야할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테니.

 

자신의 제자에게 웃음을 짓는 클레메의 모습을 본 그녀, 질투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속 변화를 눈치 챈 클레메가 화장실로 달려가 그녀에게 키스한다. 여기까진 아름다운 청춘과 다를 바 없는 영상이다. 아마도 그들은 웨딩싱어에 나오는 로비와 줄리아처럼 깊고 짧은 입맞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것이다.

 

언페이스풀의 커니와 폴처럼 화장실에서 사랑을 나누려나보다, 하는 나의 상상은 다음장면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클레메가 허리띠를 푸른 뒤 지퍼를 내리려는 순간, 그녀는 허리를 뒤로 뺀다. 그리고 포르노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을 그녀 스스로 연출한다. 세면대 앞으로 가 입을 씻는 에리카. 선생님의 지시대로 지퍼를 올리지 않은 제자 클레메. "다음엔 우리 잘할 수 있을거에요." 과연 그 다음은 언제 오는 것인지. 그 다음에도 그는 웃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선생님 목에 키스해도 되요?"
"이 방에서는 연주만 해."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구요."

 

수업 중 사랑한다고 말하는 클레메에게 건네준 편지. 그 편지 속에는 그녀의 요구가 담겨져있다. 우리 엄마를 방에다 가둬. 열쇠는 하나 뿐이야. 나를 때려줘.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내리쳐. 밧줄로 나를 묶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려줘. 관음증. 사디스트. 매조키스트. 내가 알고 있는 몇안되는 정신병 관련 용어들이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그녀는 평생 피아노하고만 살았을 것이다. 손을 다친 그녀 제자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은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성장기 내내 오직 피아노를 벗삼아 살았을 것이다. 손톱이 뭉그러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굳은 살이 박히는 동안 내내 좁은 방에서 슈베르트와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지냈을 것이다. 피아노를 떠나고 싶어도, 그녀의 엄마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테지. 뺨을 때려가며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혀놨을테지.

 

그녀는 섹스샵에 진열된 포르노 영화들을 통해 사랑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함께 하는 것' 이라는 클레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학적이고, 요구만하고, 군림하려고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것은 3류 영화 속 사랑 뿐 아니라, 그녀가 하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겠지. 40년 동안 사랑한번 못하고 피아노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당신은 환자에요. 병원에나 가보세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밑 깊숙한 곳에 감춰놨던 상자를 꺼내놓은 것이었다. 그 상자 속에 들어있던 채칙, 복면, 노끈 등을 꺼내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가 그 오랜 비밀을 풀어놓은 것은, 그를 바라보는 자신이 교수가 아닌 여성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한 자신을 다 보여준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실수였을까?

 

"당신은 나에게 혐오감만 주는군요."

 

그와 섹스를 하려는 순간 구토를 하던 그녀는, 결국 딱딱한 나무가 된다. 그녀 위에 올라간 그는 나 혼자 하게 할거에요? 같이해요? 라며 열심히 몸을 움직이지만 그녀는, 그에게 맞아 부은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 순간만큼 그녀는 사람이 아닌 나무다.

 

몸을 움직이던 순간만큼은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며 사랑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는 눈빛을 하던 그이지만, 일이 끝난 뒤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누워있는 그녀를 일으켜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가버린다. 그녀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겨우 겨우 일어난다.

 

다음날. 학교 연주회에 손을 다친 제자 대신 연주를 하게 된 그녀. 부은 얼굴로 클레메를 기다린다. 가족들과, 까만 치마가 잘 어울리는 어느 늘씬한 여자와 같이 온 클레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선생님 연주가 기대되요."

 

피아니스트로서는 최고였던 그녀였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방식은 잘못됐고, 그는 온전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에서 준비해온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면도칼로 국부를 도려내던 그녀가 그 순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뿐이다. 클레메에게 달려가 다시한번 사랑한다고 말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은 제 정신이 아니에요." 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식으로 자해를 하고, 피냄새를 맡으며,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고 느껴며, 그 존재감을 다시 한번 느끼며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리고 클레메, 클레메는 더이상 슈베르트를 치지 않을테지. 아멜리처럼 매력적인 속눈썹을 가진 프랑스 여성과 토요일 밤이면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다 침대 위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테지. 어느 늙은 미친여자가 했던 미친 짓은 잊은 채.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더 두려워지는지 모르겠다. 내게 사랑한다며 말하던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들 떠나버렸다. 지금도 내게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제 난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시어처럼 영롱하지 않으며, 영원성조차 없다. 영원히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겠다는 말은 비누방울이 되버린다. 햇볕에 반짝여 아름답지만 손만 대면 터져버리는 그런.

 

그 여름밤, 너는 내게 메일을 보내지 말았어야했다. 내 마음에 너가 던진 조약돌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파장을 남겼으니.

 

 집에 있는 칼들은 너무 크다. 내 가슴에 찌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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