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진짜 방학

헬레나. 2003. 7. 4. 23:23

 방학이다. 진짜 방학이다. 성적도 나왔고, 다행히 생각한만큼 나와줬다. 요즘 나는 유럽여행 일정이 애매해 학원을 다니기로한 계획을 수정하고 집에서 책 읽고 글쓰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흐린 하늘. 하늘은 오래된 건물 색을 하고 있다. 베란다 창 사이로 바람이 불고, 오랜만에 어떤날의 노래와 이병우의 기타연주를 듣고 있다. 오늘같은 날에 딱 어울리는 음악. 흐린하늘, 비, 구름, 달빛, 깊은밤, 혹은 새벽, 편지. 이런 것들과 어울린다. 어떤날과 이병우는.

 

 3일동안 책 6권을 읽었다.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4권, 중국견문론, 조안리의 사랑과 성공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이렇게 6권. 여행을 앞두고 국제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 3일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아, 티벳에 가고 싶다. 한비야의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세계의 지붕, 티벳. 그녀 말로는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가 아주 쓰레기라고 했지만 그 영화 속 브래드 피트의 웃음과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수능이 끝나고 처음으로 비디오방에서 본 영화였지.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게 아닌지.

 

 그리고  몽골도 꼭 가고 싶다. 길게 찢어진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엉덩이의 그 몽고반점까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 언젠가는 꼭 가리라. 넓은 초록 대지위를 뛰어가리라. 말을 타고 타박타박.

 

 세렝게티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 한번은 음악도시 25시에 만난 사람에 초대손님으로 김중만 씨가 나왔다. 그때가 세렝게티 화보집이 갓 나왔을 때다. 세렝게티 꼭 한번 가고 싶은게 소원이라고 희열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었지.

 

 고3 중간고사가 끝난 날, 교생선생님이 아프리카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Out or Africa를 보지 않았으니 내가 생각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언제나 디즈니 애니매이션 라이언 킹 속 장면들 뿐이었다. 반짝이는 강물 위를 날아가는 홍학 떼들. 마침 구름 낀 하늘 사이로 햇살이 내리 �고 역광 상태라 강물은 보석상이 다이아몬드라도 빠뜨렸는지 한없이 반짝였다. 그 사진은 고3 시절, 막막한 내게 힘을 주는 존재기도 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춰지는 것처럼 내 삶에도 볕은 내리쬐겠지, 하는 생각.

 

 이번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 그 여정에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낄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한국과는 다른 바람의 내음을 맡으며 이국에 왔음을 실감하리라.

한국에서 돌아오면, 미뤘던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며 나를 가꿔야지. 그동안 바뻐서 가지 못했던 미술관 순회도 시작할 것이다. 피카소의 판화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작가 작품들을 볼 예정이다. 당시 네덜란드를 주름잡았던 화가, 렘브란트와 루벤스.

 

 루벤스는 네로 덕분에(아로아를 좋아하던 동화 속 그 네로랍니다.) 알게 된 화가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드디어 루벤스의 그림을 봤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아이. 돈이 생기면 콩테와 종이를 사서 그림 그리던 그 아이, 네로. 화려한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나. 그 화려함 때문에 가난을 잊고 자신의 꿈을 떠올렸을까.

 

 렘브란트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작가이다. 우리에게 야경꾼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17세기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그는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초상화를 잘 그린다는 것은 단지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인물사진 역시 그렇다. 단지 찍는다고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인물사진, 혹은 초상사진을 잘 찍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진작가들은 안다. 그 사람 고유의 특징을 살려야하기 때문에. 개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천편일률적인 사진에 지나지 않고, 그 사진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이게 나야? 내가 이렇게 생겼어? 사진 참 못찍는군." 이라는 말과 함께.

 

 처음 사진을 배우고 찍게 됐을 때, 내 사진은 항상 노출 부족, 아니면 노출과다였다. 노출이 부족해 사진 속 피사체를 알아볼 수 없거나, 노출 과도로 사진이 타버려 까만 필름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내가 그렇지, 뭐, 라고 말하며 홍보관 화장실 벽을 주먹으로 탕탕치며. (마치 트라이 CF의 권상우처럼.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이덕화였건만. ^^;;)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 빛을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달라진다. 매일 같은 곳에 위치한 사물이나 자연을 찍어도 몇 시에 찍느냐에 따라 사진은 달라진다. 매 시간마다 달라지는 고도 때문이다. 고도에 따라 피사체에 생기는 그늘이 달라지고 작품은 새롭게 탄생한다.

 

 렘브란트. 그는 빛을 이용할 줄 아는 작가였고, 빛을 이용하는 그만의 작품세계는 당시 작가들에게 있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연 나는 앞으로 나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까.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전시회도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마그리트가 생각난다. 작품을 통해 철학의 세계를 보여줬던 작가. 리히터의 작품을 보면 마르리트의 그 유명한 작품, 분명히 파이프를 그렸는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라는 텍스트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그 작품이 겹쳐진다.

 

 리히터의 '베티' 라는 작품을 보면 더욱 그렇다. 딸의 사진을 찍은 뒤, 그걸 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또다시 촬영해 프린트한 작품. 그는 사진과 회화의 장르를 허문 작가이다. (영역 허물기, 하면 팝아트와 포스트 모더니즘이 생각난다. ^^ 그렇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를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는 할 수 없을 듯. 하나의 작품만으로 작가 성향을 따질 수 없지 않은가.)

 

 이밖에 동화 속 미술여행과 사진, 영상 페스티벌이 8월 중에 열린다. 유럽여행 갔다와서 구경하러 가야지. 나중에 내 손으로 쓰고 그린 동화책을 만들고 싶은 꿈을 아직 기억한다. 그래서 새내기 시절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배우러 다녔던 것이고. 2학기 때 다시 화실도 다니고 일러스트레이터도 배울 것이다. 뎃생과 조형 공부는 사진을 찍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YTN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고대신문 선배는 내게 기본기가 하나도 없다며 미대 1학년생들이 읽는 '조형의 기초' 라는 책을 읽으며 공부하라고 혼을 내셨다. 그때가 아마 4. 18이었지? 안암꼬치에서.)

 

 고등학교 시절 내 인생의 전부는 글쓰기였다. 그러나 어느새 내 관심의 더듬이는 영화로, 사진으로, 미술로, 철학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앞으로 또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며 관심을 쏟으며 살아갈까.

 

 사뭇 궁금해지는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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