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ers

치열함으로 무장된 전사, 조원희 인터뷰

헬레나. 2006. 4. 11. 22:26

 

 

 지난 2005년 12월 24일. 당시 기자는 축구선수 최성국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친구들과의 성탄전야 파티를 뒤로한 채 롯데호텔에 갔다. 가족과 연인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 라는 특별한 날임에도 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때문에 식이 끝난 후 조용히 앉아 점심식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렵게 찾은 일식집. 그러나 그곳도 빈 자리는 4개뿐. 결국 처음 본 사람들과 동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 한 명은 처음 본 사람이 아니었다.

 

 "축구 선수인가요?" 라고 묻자, 처음 본 그 사람은 '그렇다' 는 대답 대신 "그럼 제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군지 알아요?" 라고 되물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를. 기자는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요. 알죠. 아드보카트의 황태자잖아요."

 

 10월 12일 저녁, 상암월드컵경기장. 경기 시작 59초 만에 한국팀의 선제골이 터졌다. 누구지? 박주영? 이동국? 그럼 박지성? 모두 아니었다. 두 팔을 벌린 채 골을 넣은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선수는, 신예 조원희였다. A매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한 신데렐라, 조원희. 그는 아드보카트 감독이 A 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치러진 모든 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를 '아드보카트의 황태자' 라고 불렀다.

 

 그 날의 짧은 만남 뒤, '2005 삼성 하우젠 K리그 대상' 시상식 자리에서 조원희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기자를 보자 먼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기억력과 예의바른 성품에 감탄했다. 하지만 곧 그 감탄은 감동으로 바꿨다.

 

 사실 2005년 한 해 동안 조원희 보다 행복했던 선수가 또 있을까? ▲국가대표 선발 ▲A매치 데뷔▲국가대표팀 비공식 최단시간 득점기록 수립 ▲K리그 베스트11 선정 등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세우는 목표는 다 이룬 것처럼 보인다. 가히 콧대가 높아질 만도 할 법.

 

 그러나 그는 달랐다. 주변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일찍이 "이란전 MVP로 받은 상금 300만원을 좋은 일에 쓰겠다" 고 말한 바 있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K리그 시상식이 끝나자 서둘러 효제초등학교로 갔다. 어린이 복지시설 '마가렛의 집' 소속 축구교실 선수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제 능력이 닿는 한 계속 돕고 싶어요. 에이. 한번 하고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죠. 저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을 잊지 않는 한 열심히 도우면서 살 거예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춘 채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나, 드리블을 성공할 때마다 먼저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청하던 모습.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정성스럽게 축구공에 사인을 해준 뒤 볼을 토닥여주던 모습 등 그날의 풍경이 만든 모자이크는 '진심' 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하고 있었다. 실로 그가 가진 진정성(Sincere)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아니에요. 전 아직 멀었어요. 제 실력에 비해 지난 해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거든요. 2005년은 정말 행복한 한 해였어요. 앞으로 열심히 뛰면서 그동안 받은 사랑 다 갚아야죠."

 

 사실 조원희는 쇼트트랙 선수였다. 만약 초등학교 5학년 당시 축구부 선생님이 그를 데려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를 동계올림픽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많은 팬들이 경기 중에 "조원희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라고 부르는데, 지금의 대퇴부 근육은 쇼트트랙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서 기인한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재미난 사실이 많다. 전교 어린이 회장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유명하다. 4년 동안 배운 피아노는 수준급이며, 영어회화 실력 또한 뛰어나다.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2살 위의 누나와 함께  'side by side' 책을 교재삼아 미군부대에서 회화를 배우던 그였다. 그 때문에 그도 부모님도 꽤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축구와 공부, 이 갈림길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고려대에 가고 싶다는 부푼 꿈이 있었죠. 그래서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 많이 아쉬워요. 물론 단지 타이틀을 따기 위해 대학에 가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에요. 은퇴 후에 교수나 기자로 활동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계속 해야 하잖아요. 대학진학은 제 꿈을 위한 과정이자 선택이에요. 일단은 꼭 대표팀에 최종 선발돼 월드컵에 나갔으면 좋겠구요, 그 후에 제가 갈 수 있는 대학을 알아보려구요. 솔직히 어린시절부터 꿈꿨던 고려대에 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생각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데, 정말로 그 꿈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대학진학이 좌절되고, 울산현대에서 100만원 남짓 하는 월급을 받으며 연습생으로 있었다. 상무시절에는 팔이 부러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뛰었던 그였다. 프로에 와서도 '내겐 오늘 이 경기뿐이다' 는 생각으로 몸이 부서져라 경기에 임했다. 이렇게 그동안 경기장에서 보여줬던 투지와 성실함은 지금의 국가대표 조원희를 만들었다.

 

 지난 1월과 2월. 지구를 한바퀴 반이나 도는 41일간 지옥의 대표팀 전지훈련이 있었다. 전지훈련 전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지훈련이 힘들겠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장에서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노력해 꼭 '독일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 서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항상 저를 응원해주시는 팬들께 정말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시차적응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그는 햄스트링 건염까지 앓았다. 게다가  골키퍼 이운재의 뒤를 이어 출장시간이 가장 많은 선수였다. 체력이 떨어질만도 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저녁 개인운동을 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단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쏟은 노력에 비해, 전지훈련이 계속 될수록 그의 단점들을 향한 목소리들이 높아만갔다. 누군가는 그에게 수비복귀가 늦다고 말했고, 몇몇 사람들은 크로스가 아쉽다는 지적을 건넸다. 포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매일 밤, 제게 부족한 점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요. 그리고 다음 경기 때에는 어떻게 보완할지 궁리하다 잠들어요."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것이 곧 그의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어쩌면 당연한 섭리인지도 모른다.

 

 물론 요즘도 고민은 많다. 올해도 무승부 징크스가 소속팀인 수원삼성을 괴롭히고 있다. 리그 3위이지만 몇 경기 째 승점 3점을 따지 못해, 벌써 선두 성남과는 10점이나 차이가 난다. 팀내 부주장으로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최근 송종국의 부활로 독일 월드컵 호에 승선할 입지도 다소 줄어들었다.  

 

 그래도 빅버드에서만큼은 늘 웃는 모습이다. 서포터즈 '그랑블루' 를 위해 가끔 귀여운 짱구춤을 추는 팬서비스도 선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은 "열심히 뛰는 것 뿐"이라며 거친 숨을 내쉬며 그라운드를 달린다.  

 

 그렇다. 경기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치열함으로 무장된 전사, 조원희. 그가 지금 초록 잔디 위에서 보여주는 그 치열함이 독일에서도 빛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