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속바다,혹은별들

할머니, 그렇게 떠나시는구나

헬레나. 2002. 1. 1. 18:04
여덟살이던 어느날 가족들이 모두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왜 이 어른들이, 내가 울때처럼 엉엉 울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겨울, 많이 추워서 방안 아랫목에 앉아 있었던 그 겨울하고도, 12월의 어느날.

내 주변 사람, 그것도 혈연적 관계로 맺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경우는 아직 없었다.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였을까. 고등학교 때 옆반 친구가 자살을 했고,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새터 때 선이가 사고로 안타깝게 죽었다. 그게 다였다. 살면서 내가 접한 죽음은.

그제 저녁, 춘추를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집에 안들어오냐는 고모의 목소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같으면 빨리 집에 들어오라는 말 뿐인데, 오늘은 집에 안들어오는 그 이유를 물어보다니.

"너희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빨리 집에 오너라."

결국 고1 여름방학 때, 교지편집부 동기들, 선배들과 함께 외할머니댁에 가서 본 것이 살아생전 마지막 만남이 되버리고 말았다. 방학 때 외가집에 가라는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알았어, 알았어, 라고 대답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나는 또 마지막 수업의 프란츠가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았어야하는데, 하는 후회만 하는.

초등학교 때 엄마 친척네에서 놀다 먼저 외가집에 간다고 하다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동생 손을 잡고서 땀을 흘리면서 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자꾸 왔던 곳으로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내 손을 잡고 의지한 동생을 위해서라도 내 스스로 집을 찾아야한다는 의무감이 내 머릿 속을 짓눌르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이 꼬마들이 계속 왔다갔다하네. 느그들 길 잃어버렸나? 첨 보는 아들인데."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어느 집에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주문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댁이라고 했으면 됐는데, 그것조차 모르는 꼬마는 고민을 하다 말하였다.

"우리 외할머니 이름은 유태국이에요."

외할머니 이름은 나라 이름이라면서 웃었던 기억 때문에 그 이름만 또렷이 외우고 있을 때였다. 그 덕분에 나는 무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는 고생을 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며 민재오빠한테 말했다.

"처음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나긴 했어요.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을까요?"

민재 오빠가 말했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구나."

그래서 나, 눈물도 흘리지 않고 가만히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댁은 강원도 주문진 교항2리에 있었고, 여름방학 때 그곳까지 가려면 아빠차로 9시간 가량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살면서 내가 외할머니를 본 것은 채 열번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구나. 그런거구나.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고등학교 때 외가집에 갔을 때 10명이 넘는 편집부 사람들을 데리고 오느라 방이 부족해서 외할머니께서 부엌에 주무신 그때의 기억이 나자 나오지 않는다 여겼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외할머니에 대한 그 기억, 그 기억이 주는 이미지.

주황색 불빛이 낮게 깔린 부엌 바닥에 이불을 깔고서 주무신 외할머니. 외손녀 친구들이 왔다고 온 방을 내주시곤 여름이라 하지만, 그래도 불편한 부엌 바닥에서 그렇게 주무신 외할머니. 방에서 같이 자자고 자자고 했지만 손녀 친구들이 불편해할까봐 한사코 부엌 바닥만 고집했던 우리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는 길, 길가에 서있는 가로등도, 밤하늘에 떠있는 초승달도 모두 외로워보였다.

외할아버지, 이제, 주문진 그 넓은 집에서 어떻게 혼자 살아가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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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녀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죽고싶다는 말을 되뇌이고 있을 때, 할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제는 그 말밖에 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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