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속바다,혹은별들

허브 이야기

헬레나. 2002. 1. 1. 18:07
허브 이야기(by 박진성)

1.
내 방에 있던 허브가 죽었다
올 봄 그녀가 식목일 선물로 사준 허브
말라 버린 이파리를 떼어낼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는 소리가 들린다
얼만큼의 산소가 줄어든 것일까 나는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다

2.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부터
창가의 허브가 이파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이라 생각했다
가을 외투 같은 낙엽이 창문을 두드렸다
따뜻한 방 안쪽으로 허브를 옮겨다 놓았다

3.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온 날
은반지를 화분 깊숙이 넣어 주었다
뿌리에 가 닿으라고
뿌리까지 가 닿아서 내 남은 사랑을
받아먹으라고
허브의 잎들이 말라갔다
떨어지는 잎 같은 문자메세지만 보낸 날들이었다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4.
화분을 그렇게 키우면 안되지
서울 올라온 어머니는 허브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햇빛 한 줄기 안 오는 곳에 갔다 놨냐며
나무는 네 마음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고
그냥 햇빛을 받아먹는 거라고
내 못난 사랑을 나무라셨다

5.
뿌리까지 드러낸 허브에
은반지를 끼워주었다
이제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다년생이라는 작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 하나.

스무살이 되던 어느 봄날, 빛을 받지 못해 바싹 말라가는 나를 위해, 고모가 사주었던 나무. 아퍼서 누워있을 때마다, "나무야, 나무야, 내게 힘을 줘" 라는 내 말을 들어야했던 나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록빛의 싱그러움을 내 가슴에 고이 심고 간, 사랑하는 나의 나무.

나무야, 나무야, 너가 보고 싶구나. 너무나 많이.

생각 둘.
"허브가 참 빨리 자라는 것 같아."
"그보다 더 빨리 자라는 게 있어요."
"응?"
"제 마음이요."

한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의 키는 몇일까. 응?

생각 셋.
자취방에 앉아 있던 여름밤, 오빠는 이렇게 만지면 레몬냄새가 난다며 레몬밥의 향기를 맡게 해주었다. 신기하지? 정말 레몬냄새지? 라며 웃는 오빠.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오빠는.

생각 넷.
진성이 형. 형의 감수성이 부러워요.

'하늘속바다,혹은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0) 2002.10.15
나역시 그랬어  (0) 2002.09.09
어느 고대생의 안타까운 죽음  (0) 2002.07.23
^^*  (0) 2002.06.16
할머니, 그렇게 떠나시는구나  (0) 200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