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쓰는 사람

내 영혼의 길잡이

헬레나. 2003. 1. 30. 02:06
2000년 10월 20일

밤이다. 잠이 오지 않아 이불 깃을 만지면서 잠을 청하고 있는 어느 가을 밤이다. 내 방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 속에서 두개의 초가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촛불이 너울거릴 때마다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상은 웃고 있었고 고모는 그 앞에 앉아 묵주알을 돌리면서 기도를 하였다. 나즈막한 음성. 그제서야 나는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 음성이, 기도문을 외우고 있던 그 음성이 나를 편안히 재워주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일들을 회상하다보면 늘 떠오르는 몇몇의 영상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깊은 밤, 촛불 두개가 켜지곤 하던 방, 그 방에서 누웠있던 나, 그리고 기도를 하고 있던 고모, 따뜻함으로 감싸앉아진 그 기억들.

그러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하느님을 느끼게 되었고 어느새 주기도문을 외우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고모를 따라 성당에 가보곤 했다. 그때 나는 성당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바로 고통과 지루함이었다. 1시간 남짓한 미사전례 시간은 내게 거룩함 대신 그것들을 알려주었다.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다. 다들 신부님의 주는 뭔가를 먹고 있는데, 왜 나는 그것을 못먹게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앉아 있나 싶으면 신부님은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다. 앉은지 몇분 됐다고 또 일어서라니.

이제 겨우 여섯살인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당연히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고모가 나를 보며 말하였다.

"그거 가지고 힘드니? 저기 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렇게 십자가에 못받혀 돌아가셨는데... 저런 고통도 참고 이겨내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너는 누군가를 위해서 저렇게 할 수 있니?"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섯살 꼬마였던 나. 그래도 고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끄덕끄덕. 그 다음부터는 다리가 아파도 혼자 참아냈다.

내가 열세살이 되었을 때, 고모는 성당에서 영세를 받지 않겠냐며 물어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나와 동생은 영세자들을 위한 교리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산.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를 향해 걸어올 때, 마치 산이 내게로 오는 듯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산은 바로 내게 세례를 내려주신 나요한 신부님이었다.

나요한 신부님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초록 들판이 멋진 나라인 아일랜드에서 오신 신부님이었다. 처음에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이한 발음과 억양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하려면 아주 집중해서 들어야했고, 그래도 잘 이해하지 못할 때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넘어가야했다.

영세를 받기 전에 신부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그런데 같이 교리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소문이 퍼졌다. 신부님이 물어보시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 영세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수녀님을 통해 면담 날짜와 시간을 통보받은 나는 사도신경,십계명 등을 외우고 또 외웠다. 영세는 꼭 받아야한다는 굳은 신념 때문에.

똑똑똑.
들어오쎄요. (신부님의 발음. 그러나 그 억양까지 묘사하지 못해 안타깝다.)

우리 다섯명이 쭈빗거리며 문 앞에 서있자 신부님은 일어서서 우리들을 쇼파에 앉히셨다. 나는 앉자마자 슬쩍 곁눈질로 신부님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비춰지는 강렬한 눈빛. 제대로 대답 못하면 넌 하느님을 믿을 자격이 안됐다며 그냥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천주십계 칠"
"네? 아... 도... 도둑질을 하지 말라"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십계명을 하나도 못 외운다. 영세 받고 나서 다 잊어버렸다. 못말리는 날라리 신자. --;)

휴. 다행이었다. 제대로 대답한 것이다. 이로서 영세는 받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나는 그만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한번 웃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있자니 논리적 어법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웃겼던 것이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도 말해주고 싶은데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이는 것까지 웃겼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웃어버리면 배로 야단 맞을 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내가 좀 그랬다고 울려고 그러니? 어서 가라. 선생님은 웃고 싶은데 웃지 못하는, 그래서 괴롭게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그리 말씀하셨다.

어쨋건 그때도 웃음이 풋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한손으로 입을 가린채 꺽꺽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갔던 아이들 역시 싱거운 녀석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일제히 신부님 앞에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신부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물어보셨다. 내가 개그맨 카타요? 왜들 그래요?

나, 참 신부님이 좋았다. 그래서 신부님께 이쁨을 받고자 교리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 첫 영성체를 받던 날(그 영광스러운 날, 나는 사진 한장도 못찍었다. 진짜 무관심했던 우리 가족들. T.T) 교리 시험 결과를 발표하며 시상을 했는데, 내가 1등을 한 것이었다. 그때 신부님은 축하의 악수를 해주시며 보라색 묵주를 선물로 주셨다.

신부님은 내게 타인을 걱정하며 헤아리는 마음을 가르쳐주셨고, 내가 다른 이를 위한 기도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을 때, 그 주인공이 되신 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신부님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했었던가.

영세와 영성체를 받은지 얼마 안되고 나서, 신부님이 기브스를 한 채 쩔뚝거리면서 성당에 나타나셨다. 강론시간이 되자 신부님은 의아해하는 신자들을 위해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셨다. 시골에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던 길,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비가 왔고, 빗길에 그만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졌다고.(그래도 지금 생각하니 너무 멋있다. 혼자서 부웅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고 생각해봐라. 로망칼라의 신부님이 말이다. ^^)

그래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온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고. 하지만 우리 성당 신자들과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절벽을 기어 올라갔고 지나가던 차를 향해 손을 젓다가 그대로 쓰러졌다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했다. 우리 신부님이 빨리 나아서 건강하신 몸으로 미사를 집성하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아,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도 생각난다. 신부님, 크리스마스를 축하드립니다. 라고 써서 그렸던 은색 별이 달린 크리스마스 카드. 아침 미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 그 카드를 사제실 문 틈에다 낀 채 도망갔었지. 그리고 며칠 뒤 카드 보셨냐고 물어보았었지.

카드 고마웠다는 신부님을 바라보며 나는 앞으로도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카드를 드려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내가 신부님께 드린 카드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해 여름, 신부님은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아직 우리 성당에서 보내야할 날들이 많았지만, 결국은 떠나야만하셨다. 서울 대교구 때문에? 아니면 신부님 개인사정 때문에? 아니었다. 그런 이유들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성당 사람들 때문이었다. 애초에 하느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자격'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당신들은 과연 하느님을 믿을 '자격' 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

우리 성당에는 우리 나라 신부님이 있어야하니, 이제 신부님이 가셨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신부님은 많이 상처를 받으신 듯했다.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그저 이 성당에 조금이라도 더 남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너무나 슬프다고.

그때 나는 왜 신부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다. 다만 그때 신부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고, 보이지 않는 눈물로 뒤덮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정적'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미사시간이었다.

프란츠. 그날의 프랑스어 수업이 마지막 수업임을 알게 되었을 때, 프란츠는 그동안 새둥지를 찾아 돌아다닌 일을, 샤르 냇가에서 얼음을 치느라 학교 수업을 게을리한 일 등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항상 너무 늦게 찾아오곤하는 법이다.

"나는 너를 꾸짖지 않겠다, 프란츠야. 너는 벌써 충분히 벌을 받은거야...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날마다 너는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겠지. 뭐 서두를 것 없어, 내일 배우면 되지- 그런 결과로 어떤 일이 빚어졌는지는 네가 아는 대로란다. -마지막 수업 중에서-

아멜 선생님의 말씀이 화살이 되어 내게 날라왔다. 환경 미화를 해야한다고, 친구 생일잔치가 있다고 한 두번씩 빠졌던 미사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날들을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날, 슬픔밖이 보이지 않았던 신부님의 얼굴은 결국 내 마지막 기억이 되버렸다.

그 뒤로 나는 한번도 신부님을 뵙지 못했다. 어느 성당에 계시는 것일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스칼렛이 방영할때면 고향이 나온다고 좋아하시곤 하셨는데, 고향인 아일랜드에 가신 것일까. 그래도 신부님은 성당을 떠나시는 그날도, 그 이후에도 우리 성당 사람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내려주시기 바란다며 기도를 하셨을테지.

그 신부님이, 나는 지금 무척 그립다.
---------------------------------------------------

 

오늘 아침은 이상했다. 화장실에 가는 대신 포카혼타스 O.S.T를 들으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내 삶의 뭔가가 빠져나간 느낌. 잊은듯한 혹은 잃은 듯한 기분.

 

"일어났니? 밥 먹을래?"
"응."

 

부엌으로 가던 고모가 다시 방으로 왔다. 신부님 돌아가신거 아니?, 라고 말하며. 신부님이라? 처음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신부님일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 학교생활, 신문사 생활에 치여 이제는 잊혀진 사람이 된 신부님. 나의 신부님.

 

"너랑 같이 사진 찍은 신부님 있잖아. 이름도 잊어버렸네. 아무튼 그 신부님 돌아가셨다네?"
"뭐? 정말? 어떻게 알아?"
"신문에 나왔어. 경향일보에 기사가 실렸더라"

 

책장에 놓여진 액자를 가르키며 고모가 말했다. 그 액자 속에는 하얀드레스를 입고 있는 13살의 나와내게 막 세례를 내려주신 신부님이 웃고 있었다. 나요한 신부님. 그 신부님이 돌아가셨구나.

 

맨 위에 올린 글은 고등학교 때 쓴 글이다. 이 글을 써서 난 전국 청소년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글을 쓰던 날에는 수능만 끝나면 꼭 신부님을 뵈러 갈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상을 받던 날에는, 상장과 함께 이 글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신부님,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시겠지?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던 내 상상들. 하지만 결국 그 다짐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천국에 가셨겠지, 천국에 가셨겠지, 그러니 슬퍼하지 말자, 괜찮아, 라고 내게 말하며. 하지만, 하지만, 나는 슬퍼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내린 벌. 나의 무관심과 무심함이 내게 안겨준, 어쩔 수 없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상처.

 

1월 28일 화요일자 경향신문 제 14면 사람과 사람면, 오른쪽 하단에 1단기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호평동 성당의 나요한 주임신부(61. 사진)가 지난 26일 오후 4시 15분 선종했다. 빈소는 명동성당 지하성당이며 장례는 28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대성당에서 정진석 대주교와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치러진다. 아일랜드 출신인 나신부는 1966년 한국으로 와 88년까지 춘천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2001년부터 호평동 천주교회 주임을 맡아왔다.

 

사진 속 신부님의 모습은 내 기억 속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 안경이며 짧은 스포츠 머리하며, 변한 것 하나 없는 모습이란. 웃음이 나왔다. 대학합격 후 찾아뵈었다면 신부님은 날 알아보셨을까. 염색한 긴 머리를 하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 내며 찾아왔다면, 그 모습에서 짧은 단발머리를 나폴대며 뛰어다니면 꼬마소녀를 기억할 수 있을련지.

 

정신없이 보낸 대학 1,2학년 생활. 그 사람을 생각하며 울던 적은 있지만 신부님이 보고 싶다며 눈물 흘린 적은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던 그 시간에도 나는 나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매정한 사람,자신만 아는 사람,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 바로 나라는 사람.

 

가끔, 아주 가끔은 결혼식은 꼭 명동성당에서 혼배성사로 치룰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때마다 혼배성사를 집성할 신부님은 내게 세례를 내려주신 나요한 신부님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입학 후 처음으로 신부님을 생각하던 그날, 서울대교구에 전화를 걸어 나요한 신부님의 소재지를 파악해야했다. 왜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환갑의 나이에 천명하신 신부님. 아프셨던 것일까. 왜 그리도 짧게 사셨는지. 신부님 자신은 오랜 세월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하셨겠지. 이제 주님의 나라로 가게됐다며 웃으시면서 가셨겠지.

 

그렇지만 신부님, 저는 어쩌죠? 이제 결혼할 때 제 혼배성사 어느 신부님이 집성해주셔야하나요? 내게 세례를 내려주셨던 신부님께 꼭 내 배우자를 소개시켜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빨리 떠나시면 어떡하라구요.

 

색깔이 들어간 안경도 생각나고 마디마디가 아주 굵었던 그 주름진 손도 생각나요. 신부님은 팔이 참 길었어요. 스포츠 머리가 그렇게 잘 어울리던 중년의 신부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신부님밖에 없었지요. 그 회갈색의 스포츠 머리란.

 

신부님같이 잘생긴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가 고모한테 야단 맞은 기억이 나요. 처음 강론시간에 독특한 억양에 익숙치 않아 무슨 말씀을 했는지 못 알아듣던 내 모습도 생각나구요. 그리스도, 라는 발음만큼은 정말 최고였는데. 그 굴러가던 발음을 들으며 키득대다 수녀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지요.

 

전화라도 드려야했어요. 편지라도 썼어야했는데. 왜 크리스마스 카드 보낼 생각을 못했을까요? 후회만 남아요. 기도말고는 더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현실이 슬픕니다. 이 슬픔을 어찌 주체할 수 있을까요? 이제 어쩌지요? 전.

 

신부님이 떠나시자 갑자기 막막해져요. 그동안 몰랐나봐요. 신부님이 내 마른 영혼의 길잡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소중한 사람은 떠난 뒤에 안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16살 이후로 한번도 신부님을 뵙지 못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나라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된다면 그때서야 만날 수 있겠지. 그 길에 이르기까지는 10년이 걸릴 수도 있고, 9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날까지 잊지 않고 기도하련다. 부디 천국에서 뵐 수 있기를, 그날까지 나를 잊지 않으시기를.

이 글을 쓰면서 부음 소식을 접했을 때 나오지 않던 눈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늘같은 날은 많이 울어도 괜찮아. 실컷 울어보렴.

나에게 말한다.

'꿈을 쓰는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O형 아가씨, 눈보라 뚫고 헌혈하러 가다  (0) 2008.01.12
스무살의 꿈  (0) 2006.03.27
눈물과 함께 끝이 난 고연전  (0) 2003.01.22
슬퍼요  (0) 2002.11.29
제발, 살 수만 있다면  (0) 2002.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