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있던 방

저녁만 있는 일요일

헬레나. 2003. 4. 14. 03:03

신문사 일 마치고 응원단 신입생 환영회 뒷풀이 자리에 놀러갔다가 집에 왔다. 하루종일 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깊이, 아주 오래도록 잤다. 언제나처럼.

 

사실 남동생이 내 방에서 과외를 하지 않는다면 더 잤을텐데 아쉽게도 깼다. 일어난 시간은 오후 6시 반. 해는 어느새 저물어져가고, 오늘도 저녁만 있는 일요일을 보냈다.

 

꿈을 꿨는데 아주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나왔다. 왜 매번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 그 사람은 지금 내 이름조차 잊었을지 모르는데. 꿈에서 나는 전화를 했고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또 울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꿈.

 

빈 속에 쫄면을 먹고, 타이트한 청바지에 헐렁한 후드 T를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비디오를 빌리러 갔다. 지금 이 시간만큼은 귀여운 여인. 이 쫄 청바지를 학교갈 때 입고 갈 용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1학년 때 대동제 기간에 치마를 입고 돌아다닌 이후로 바뀐 나의 옷차림. 당시 치마 입은 내 모습을 본 체교과 애들이 아주 심하게 뒷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치마 안 어울린다고. 그 뒤로 절대 못입겠다. 지금은 아주 평범하게 입고 다닌다.

 

화장도 안하고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갔는데 비디오 가게 아줌마는 나를 알아봤다. 화장을 하나 안하나 그게 그것인가보다. ㅠ.ㅠ 그래도 어제 뱃노래 오빠는 이제 화장도 하니? 하면서 알아봤는데. 이뻐지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그래서 고른 비디오, 쉬즈 올댓. 학생회장에다 축구부 주장까지 역임하고 있는 잭. 거기다 키도 크고 준수한 외모까지 지닌 학교 최고의 킹카다. (잭을 본 순간 홍정욱이 생각났다. 하지만 감투만 비슷했을 뿐 그처럼 정치적이지는 않는 순수한 남자로 나왔다.)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연예인 남자친구가 생기게 되면서 이별통보받는 잭. 그는 뭐든지 얻어왔고, 뭐든지 해냈다. 그런데 갑자기 차이다니.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는 없지만 잭은 말한다. 여자만 2천명이니 그정도 퀸카는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친구의 냉정한 한마디. "걔만한 애는 없어." "아냐, 나랑 사귄다면 누구나 다 퀸카가 될 수 있어."

 

뭐든지 해내는 녀석. 뭐든지 가진 녀석. 평소 그런 잭을 고까워하던 친구가 내기를 제안한다. 과연 너가 평범한 여자를 졸업파티 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암울한 그림을 그리는 칙칙한 아이, 레이니. 얼굴의 반을 가린 투박한 뿔테 안경에 대충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은 왕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하게 되고, 반짝이는 눈망울과 매력적인 웃음을 지닌 소녀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만개의 불빛이 반짝이는 뒷뜰에서, 수영장 표면에 반사되는 달빛을 받으며 잭과 춤을 춘다. 그리고 로맨틱한 키스까지. kiss me, out the bearded barley Nightly, beside the green, green grass. 식스펜스 넌 더 리치의 키스 미, 라는 노래까지 때맞춰 나와주는 낭만적인 밤.

 

"나는 너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동안 나는 너무나 힘들었고, 거대한 슬픔 속에 잠들어있었거든."

 

신데렐라컴플렉스에 빠진 환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나 그 누군가가 언젠가 내 속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찾아내주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멋진 남학생이 왕따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워크 투 리멤버나 오늘 본 쉬즈 올 댓 같은 영화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잡고 아주 많이 울었던 밤. 그 밤이 지나고 또 밤이 됐을 때 나는 F4를 메고 노천극장에 있었다. 산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떨고 있었다.

 

저녁도 못먹고 취재를 하고 있던 그때, 왜 그렇게 핫도그가 먹고 싶던지. 왜 지갑을 신문사에 두고 나왔는지. 노천극장 뒷편에 있던 연수관 친구들은 돈이 없다겨 냉정하게 핫도그를 사줄 수 없다고 했다.

 

지난 여름, 참살이길 벤치에 앉아 점심을 못먹었다고 칭얼대며 전화를 걸었던 그 여름날의 저녁이 생각났다. 때마침 권진원이 무대 위로 나가 진심을 불러주었고, "너무나 사랑하기에 나의 모든 것을 다 준다해도..." 라는 부분이 나왔을 때 바보같이 또 울고 말았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서 글을 써본다. 참, 핫도그가 먹고 싶었던 그날은 3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그리 옛날 일도 아닌 듯.

 

학교에 가면, 다람쥐길과 참살이길, 문대, 미술학부 건물 뒷편에 있던 벗꽃들은 다 졌겠지? 벚꽃 나리는 봄날, 분홍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웃던 마츠 다카코가 되고 싶었다. 그런 꿈에 젖어 웃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피아노가 있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틀란티스 소녀  (0) 2003.06.09
절대로 그애를 놓치고 싶지 않다  (0) 2003.04.20
정신없었던 한주를 보내며  (0) 2003.04.05
자전거 탄 풍경  (0) 2003.02.11
마리 이야기  (0) 2002.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