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속바다,혹은별들

소나기

헬레나. 2003. 6. 14. 18:01

김민기 새앨범을 사서 듣고 있다. 그동안 김민기가 만들어낸 곡들을 러시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새롭게 연주해 녹음한 앨범이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만들어내는, 내가 좋아하는 선율들로 가득찬 앨범. 때마침 아침이슬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음악시간에 제임스 골웨이가 플루트로 연주하는 아침이슬을 듣고, 나는 플루트를 배우게 됐지. 그 시절 생각이 나는구나.
 

지금은 오후 4시. 아까만해도 비가 그렇게 내리더니 어느새 햇빛이 쨍쨍하다. 소나기였나보다. 소나기. 참 오랜만에 본다. 요 며칠 간 그렇게 주룩주룩 비만 내리더니.

 

비, 하면 언제나 생각나는 것은, 1학년 1학기 국어 기말고사를 앞둔 6월의 어느 오후 풍경이다. 강의실에 앉아 교양국어책을 훝어보며 벼락치기 공부를 하다 수분을 머금은 흙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땅은 비에 젖어있었다. 비에 젖은 땅에서 나는 비냄새. 비에서 나는 흙냄새. 국어책 위에 놓여진 내 손은 어느새 창밖에 있었다.

 

후드득, 후드득. 내 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수십개의 빗방울이 내 손에 자취를 남기고, 나는 그 흔적을 느꼈다. 그때만큼 마음이 편안하던 순간이 있었으랴.

 

역학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던 날, 서점 진열대에 놓인 6월호 페이퍼를 봤다. 6월. 내 생일이 있는 달이라 이번호 페이퍼는 꼭 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이번 주제가 소나기란다.

 

아무런 전조도 없는 듯했지만
그저 몰랐을 뿐이었지
비를 잔뜩 머금고 바삐 움직이는 구름들과
잠시 숨을 멈추고 있는 바람을

아주 갑자기 끝나버린 듯했지만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을 뿐이었지
점점 희미해지는 구름의 빛깔과
가쁜 숨을 고르는 바람의 소리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고
잡으려면 잡을 수도 있었어
청춘이 지나가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사상 몇 번이나 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지
다 지나가도록
소나기 같은 너와
소나기 같은 그 사랑이

-6월호 페이퍼에서, 황경신, 소나기

 

비오던 가을 아침,
대강당에서 피아노를 치던 사람.
익숙한 그 집앞을 들으며
나는 오래도록 강당 책상에 귀를 기울인 채 앉아 있었다.
너의 생일이었던 그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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