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있던 방

NEW PARADISO(신 시네마천국)

헬레나. 2003. 8. 15. 19:08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시네마천국. 아니 신시네마천국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처음 개봉할 때 넣지 못한 부분을 다시 넣어 편집한 감독판이다. 후에 우리나라에는 '신시네마천국' 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개봉했고. 전자가 토토와 알베르토와의 우정이 중심이 됐다면 후자는 토토와 엘레나의 가슴아픈 사랑이 중심이다. 신시네마천국을 보면 그둘이 왜 그렇게 엇갈릴 수밖에 없었는지, 또 그 사이에 있던 알베르토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또한 알 수 있다.

 

영화 속을 흐르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으며 내 고3시절을 생각했다. 그 시절, 매일 아침 명상의 시간 때마다 학교에서는 시네마천국 O.S.T를 틀어주었다. 나는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알베르토 아저씨와 자전거를 타고 가며 웃던, 꼬마 복사 토토의 미소, 혹은 비오는 여름밤, 그 비를 흠뻑 맞으며 엘레나와 키스하던 토토의 설레임 등을 생각하곤했다.

 

예전에는 무심히 넘어갔을 법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토토가 살고 있는 마을. 시실리 섬.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한국인 커플-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커플이 아니라고 했다. ^^ 단지 학교 친구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커플이었는걸. 여자가 화장실 간 사이에 남자는 "거의 다 넘어왔는데, 사귀자고만하면 튕겨서 어찌할 지 모르겠다" 고 내게 토로했고, 이론만큼은 박사인 내가 코치해줬다. ^^;;- 베네치아까지 가면서 자신들이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탈리아에 온만큼 시실리에는 꼭 가라며 그곳을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이 있어 가지는 못했다.

 

그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섬이라고 말했던 곳이, 시네마천국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곳이다. 시네마천국 극장은 무너졌지만 알베르토 아저씨의 마법으로 야외에서 영화가 상영된 광장. 턱을 괴고 앉아 엘레나가 타고오는 5시 버스를 기다리던 그 광장은 있지 않을까. 그곳에 가면 광장은 내꺼야, 라고 말하던 미친 아저씨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공주를 사랑한 병사 이야기. 한동안 인터넷 곳곳을 돌아다녔던 그 이야기는 바로 이 영화에 나왔다. 자신을 사랑한 병사에게 공주는 100일동안 매일 성 아래서 기다린다면 그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사는 99일 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99일 째되던 밤, 갑자기 떠나버린다. 그는 왜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 토토는 알베르토 아저씨의 이야기에 대한 답을 후에 말한다. 엘레나가 떠난 뒤 아저씨와 함께 해변을 걸으며.

 

차에서 내려 조금은 도도한 표정으로 토토를 바라보며 걸어가던 엘레나. 웨이브 진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자 손으로 살짝 정리한 뒤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만남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토토는 카메라에 담아 영사실에서, 또는 집에서 틀어놓고 바라본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모습부터 미사포를 머리에 쓴 채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모습까지,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녀를 바라보면 나, 토토는 할말을 잃는다.

 

기약없는 기다림. 비를 맞으며 바람을 맞으며 새해를 앞둔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순간에도 혼자 그렇게 그녀 집 앞에 서서 기다린다. 한순간의 기대가 사라지자 영사실로 돌아와 엑스표를 쳤던 달력들을 찢으며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데... 엘레나, 그녀가 영사실에 왔다. 빨간 코트를 입고.

 

밭에 앉아 먹는 식사, 케�의 촛불을 끄고 나누는 키스, 망가진 자동차 타고 어딘가로의 드라이브. 그 모든 것들을 토토와 엘레나는 함께 한다. 영사기를 돌리며 엘레나 이름을 외치는 토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힘든 순간을 이기려는 그 모습이 묘하게 슬프다.

 

곤도러들이 이런 날까지 일해야하냐며 불평하는 여름밤, 시네마천국 극장에서는 여름을 맞아 야외상영을 하고 팔베개를 한 채 엘레나를 그리워하다 비를 맞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온 몸으로 엘레나의 체온을 느낀다. 토토, 오늘 돌아왔어.

 

삼십년이 지난 후에 시실리의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알베르토 아저씨의 장례식이 끝난 뒤 그곳에서 엘레나를 닮은 여자 아이를 본다. 들고 있던 더블 위스키 한잔을 떨어뜨릴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충격.

 

커텐 너머로 비치는 엘레나의 실루엣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는 토토.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인가. 아니면 유독 토토에게만 그랬던 것인가.

 

"내가 이곳에 있었는지 어떻게 알았어?"
"토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당신을 완전히 다 잊지는 않았어."
"...."
"원래 이름도 좋았는데. 토토, 얼마나 좋아. 토토. 토토. 토토..."

등대에서의 회후. 여전히 아름다운 엘레나. 여전히 혼자인 토토. 그들의 짧은 키스.

 

어린시절, 그에게 있어 전부였던 시네마천국 극장은 무너졌다. 고개를 돌려보는 순간, 그 시절 언제나 볼 수 있던 사람들이 눈 앞에 있다. 그리고 엘레나, 나의 엘레나 역시.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고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웃으며.

 

알베르토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 종을 흔들던 신부님 때문에 상영되지 못했던 키스 장면들을 연결해 만든 필름을 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토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베르토와의 우정? 영화를 향한 어린날의 순진했던 열정? 아님 한시도 잊은 적 없던 엘레나를 향한 가슴 아픈 사랑.

 

시네마천국 극장에 불이 났을 때, 어린 토토는 끙끙대며 정신을 잃은 알베르토 아저씨를 혼자 힘으로 끌고 내려간다. 그러다 힘에 부쳐 누구 없어요? 라고 말하며 우는데, 처음 그 영화를 보던 열여섯의 나는 그 장면에서 토토와 함께 울었다. 두번 째로 그 영화를 본 스무살 시절에는 엘레나를 향한 토토의 마음이 나를 슬프게 해 울었다. 그리고 어제, 세번 째로 이 영화를 봤을 때, 내 자리도 있냐며 부인의 인도를 받으며 새로 지은 시네마천국 극장에 온 알베르토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울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될 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까. 혹 내 어린 날, 그때의 치기를 생각하면서 우는 것은 아닌지.

 

추신)
1. 시실리섬. 언젠가는 가보리라. 태즈매니아, 몽골, 인도, 티벳에 이어 시실리섬도 추가. ^^

2. 어린토토는 기차에서 만났던 프랑스 아이, 안토니를 쏙 빼닮았다. 안토니가 나이가 많아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주 많이 닮은 것은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