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있던 방

싱글녀, 혼자 싱글즈보다

헬레나. 2003. 8. 15. 13:18

제목만 보면 뭔가 참 구질구질한 느낌도 들고, 신세한탄하는 글로 비춰질 듯하다. 그래서 서두에서 절대 그게 아니라고 먼저 말한뒤 글을 쓸까한다. 단지 싱글녀와 싱글즈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재미나서 이런 제목을 붙인 것 뿐이니. ^^

 

어제 피곤해서 8시부터 잔 나는 다음날 8시까지 12시간을 곤히 잤다. 한국에 온지 아직 일주일도 안됐지만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차적응에 성공했다. (난 워낙 적응력이 강한 사람인지라 금새 도착한 곳에 동화된다. ^^)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조금만 일찍 자려고 하면 "시차적응 아직 안됐지?"한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도, 조금만 늦게 자도, 또 조금만 늦게 일어나도 다들 시차적응 운운하니 그 소리 듣는 것도 이제 지겹다.

 

8시에 일어나 어김없이 맘마미아 O.S.T를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반찬이 없어 엄마한테 밥 차려달라고 하니 나보고 해먹으란다. 그러나 내가 해먹기는 귀찮아 아침부터 고추장에 밥 비벼 먹었다. ^^;;

 

어제 신문을 읽다 작가 함정임이 10년간 파리를 방문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글로 적어 사진과 함께 출판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인생의 사용' 이라는 산문집이며 유럽의 묘지들을 돌며 쓴 산문집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도 함께 냈다고.

 

마침 베르베르의 나무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베르베르의 책을 번역해서 펴냈다. 열린책들 출판사 사장은 홍지웅씨로 고대신문 선배님이시다. 지난학기 고대신문 신설코너 중 선배가 말하는 나의 직업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각계각층에서 일하고 있는 고대 선배님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코너였는데 그때 이분을 만나 인터뷰했다. 출판사가 미술관처럼 고풍스럽고 분위기있어 시종일관 좋겠다, 라고 속으로 눈물흘리며 부러워했었지. 인터뷰가 끝나고 책도 선물로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 오스더 책, 공중곡예사. ^^ 그 책이 구겨질까봐 카메라 가방에 조심해서 넣었던 기억이 난다. 신문사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헤헤 웃으며 꺼내봤던 기억도.

 

마침 싱글즈와 브루스 올마이티도 보구 싶었다. 오랜만에 종로에 가서 책도 사고 영화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서울극장 상영시간표를 확인했다. 10시 반에 브루스 올마이티를 하는데 빠듯하게 가기가 싫어 12시 반에 싱글즈를 보고 이어 2시 40분에 하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기로 했다.

 

맘마미아 O.S.T 들으며 준비하고 좌석버스타고 종로로 출발. 유럽의 지하철과 버스에는 에어컨이 없다. 더구나 지금 유럽은 폭염이 아니던가. 알프스 빙하가 녹아 산 정상에 폭포가 생길정도니.(9시 뉴스에 나왔답니다!) 그 더위에 고생을 하고 돌아오니 한국은 너무나 시원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게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버스에서도 추워서 가방으로 최대한 몸을 가리고 떨며 갔다. 가는 길에 한달만에 학교도 보고. 아직 지하철역에서 제2경영관으로 가는 통로공사가 끝이 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바뀐 것 없이 여전하다. 학교는.

 

광화문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내려서 교보문고 지하계단으로 가려는데 일본인 관광객 2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살피고 있다. 가서 도와줄까? 여행 중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했던 현지인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친절함 때문에 나는 그 나라가 너무나 좋아졌지. 스위스가 그랬고, 오스트리아가 그랬다. 그래! 도와주자! 그런데 그들은 길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쉽지만 여기서 이만.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는 아르바이트생이 찾지 못해 사지 못했다. 대신 나무, 인생의 사용, 8월호 페이퍼, 8월호 지오, 8월호 도베를 샀다. 그리고 음반매장으로 이동해 새로나온 음반을 둘러보다 내 인생의 영화음악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샀다. 14인의 영화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음악 하나씩을 골라 그 노래만으로 음반을 구성했다. 그래봤자 미션, 시네마 천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 에반게리온,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등 익히 들은 곡들이다. 그래도 사고 싶어 골랐다.

 

종로극장에 가려고 교보문고를 나오다 낯익은 남자를 봤다. 어디서 봤지? 우리학교 학생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회전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민정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원이었다. 여기서 또 우연히 만나다니. ^^ 그 낯익은 남자는 유원이 남자친구였고. 둘이 같이 책 고르러 교보문고에 온 모양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데이트를 유원이가 대신 하고 있구나. ㅠ.ㅠ

 

서울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의자에 앉아 도베를 읽다 배가 고파 나쵸를 안주삼아 콜라를 마셨다. (술 마시는 듯하네. 어째 표현이~ ^^) 그리고 커플들 속에 끼어 싱글즈를 봤다. 29세의 크리스마스라는 일본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 우리나라식으로 다 바꿔나서 지극히 한국적이다. 하지만 노처녀들의 이야기는 어느 나라이건 거의 다 비슷하지 않던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그랬듯이. ^^

 

나난(장진영) 수헌(김주혁) 정준(이범수 분) 동미(엄정화 분) 이렇게 4명이 엮어가는 이야기. 나난과 수헌이 우연히 만나 조심스럽게 사랑을 만드는 그 과정이 좋았다. 마치 내 모습 같아서 말이지. 누군가를 알게되고, 그 사람이 내게 있어 특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이. 그 설레임이.

 

고등학교 때 어느 만화가가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고하며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내 대학시절, 수업이 끝나고 나오던 복도에서 그 아이에게 고백을 받았었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서서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들은 고백." 그 글을 읽으며 대학에 가면 나도 이런 고백을 받을 것이라 막연히, 아니 당연히 생각했다. 그때는 다 그렇지 않던가. 대학에 가면 당연히 이뻐지고, 또 당연히 남자친구가 생길 거라고. (그거 다 뻥이다! 아무 노력도 안하고 절로 생기는 건 절대 없다. 콩고물도 노력해야지 얻을 수 있는 법!)

 

과장이 추행하자 바로 달려와 주먹을 치는 모습도, 연극보며 살며서 어깨 위에 손 올리는 모습도, 집에서 차마시다 키스하는 모습도, 극장안의 사람들은 박수치며 웃었지만 나는 사춘기 소녀라도 된냥 두 손 꼭 잡고 "멋져!" 라고 외치며 봤다. ^^;; 나도 나중엔 내가 일 끝나면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고, 내가 타주는 차를 마시고 싶어하고, 벤치에 앉아 옛날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만났다며 울먹일 때 키스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있을...까? 아냐, 있을거야... ㅠ.ㅠ

 

하지만 나는 귀여운 여인의 비비안처럼 에드워드가 리무진을 타고 달려와 키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오히려 에드워드가 돼 고소공포증을 이겨내며 그 철계단을 올라가 키스하리라. 그게 나답다. 조금씩 서로를 알게되고 사랑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가슴 설레여하지만, 조안리의 말처럼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나는 능동적으로 내 사랑을 하리라.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기에 매달 1000만원 씩 벌어다주고, 파슨스니 피트니 하는 뉴욕의 비싸고 유명한 패션학교에도 보내주겠다는 수헌의 말도 거절하는 나난. 정준의 아이가 아닌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집도, 돈도, 직업도 없지만, 그때문에 아버지께 코피 터지도록 맞지만 그래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동미. 그런 모습이 나다운 모습이겠지.

 

이 영화를 보고 같은 곳에서 브루스 올마이티를 봤다. 처음에 자막을 보지 않고 원어로 듣고 해석하며 봤는데 웬일. 단어가 잘 안들리는 거다. 영어공부 많이 해야겠다고 온몸으로 느꼈다. ㅠ.ㅠ 짐 캐리 특유의 표정과 말투 때문에 시종일관 웃게하는 영화. 하지만 단순히 웃는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짐캐리가 웃기는 배우가 아니듯이.

 

채널 5의 앵커. 하지만 그는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아닌 웃기는 복장을 하고 사람들을 취재하는 앵커다. 아니 리포터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방송을 위해 우유를 들고 뛰어 와 아이들에게 주는 장면에서는 불의전차 메인 타이틀이 나오는데, 그 패러디장면을 시작으로 해서 시종일관 웃게 만들었다.

 

The one 역할을 했던 모건 프리먼 아저씨가 말했다. 기적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모든 이들에게는 그 능력이 있는데 다만 그들은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영화는 여러분 자신이 기적이 되세요. 그래서 기적을 만드세요, 라고 내게 말했다.

 

한때 내게 기적을 내려주세요, 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적이란, 막연히 남자친구랑 이런거 하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 사람이 이뤄주는 것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갑자기 쨘~ 하고 이뤄주는 것. 그게 내게 있어 기적이었다. 동시에 두곳에서 있기,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교회에서 결혼하기 같은 제이미의 소원을 브랜든이 이뤄준 것처럼. 어 워크 투 리멤버를 보고 나서 얼마동안 내 머릿 속은 '기적' 그것이 내게 와줬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적은 진실로 바라는 간절한 마음없이는, 그것을 향한 눈물겨운 노력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 좌석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 기다리다 유료 화장실도 보구. 그동안 종로에서 집으로 갈 때마다 봤지만 한번도 주의깊게 본 적없는 화장실. 그러나 유럽에서 유료 화장실에 시달릴 때로 시달렸기에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사용료는 백원. 유럽은 보통 4~5백원한다. 다만 같은 점이 있다면 유럽처럼 시간이 지나면 문이 저절로 열린다는 것. ^^

 

두리오빠도 차태현이랑 첫사랑사수궐기대회와 쟈니잉글리쉬를 연속해서 봤을 때 지쳐 뻗었다던데, 나역시 조금 지쳐 완전히 몸을 누인 채 잤다. 자던 중 어떤 아줌마가 아픈 거 아니냐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한국은 역시 한국이다. 유럽에서는 내가 그렇게 자던지 말던지 신경도 안썼을테지. 아닌가? 그래도 ICE타고 프랑크푸르트로 갈 때 속이 메스꺼워 힘들어하자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괜찮냐고 묻던 여자가 있었으니.

 

집에 돌아와 함정임의 산문집을 읽으며 5년 뒤 내 모습을 꿈꿔본다. 그녀의 문장은 꽤 괜찮지만 사진들은 영 아니다. 차라리 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들만 드는 사진들의 연속이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문장력을 길러야지. 내가 더 멋지고 아름다운 글과 사진을 책으로 엮어 펴면 되잖아.

 

오랜만의 외출. 꽤 좋았던 어느 여름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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