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있던 방

아름다운 청춘

헬레나. 2002. 1. 1. 18:14
어떤 영화를 볼지 결정할 때, 망설이며 이걸 볼까, 저걸 볼까, 하며 갈등할 때 그 결정을 확실하게 내려주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바로 키스씬~ ^__^

대부분의 영화 속에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는 언제나 나의 두 눈을 똥그랗게 만드는 키스씬이 늘 들어있는 법이고.

아름다운 청춘 포스터는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였다. 망사 스타킹을 신은 노숙한 여자와 금발의 남학생이 키스를 하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였는데, 포스터 속의 두 남녀는 내게, 우리는 바로 지금 모든 것을 다 잊고선 상대와의 입맞춤만 생각하고있노라,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포스터를 볼 때마다 늘 생각했다.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면 이리도 깊고 열정적으로 하는 것일까? 하는.

그리고 대학에 와서 드디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유원이네 동아리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집에 가지 못해 새벽에 갈 곳이 없던 우리는 비디오방으로 갔다. 비디오방에서 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 아름다운 청춘.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스웨덴 말뫼의 한 고등학교. 그 학교에 비올라(마리카 라저카랜츠)가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한창 성적 호기심에 부푼 남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그곳에 포스터 속의 남주인공인, 스틱(요한 비더버그, 감독의 아들이다.)이 있다.

영화 속 고등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은 대단하다. 그런 와중에 비올라라는 여교사가 왔으니 그들의 호기심이 그녀에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틱 역시 그녀를 교사이기 이전에 여자로 느끼게 된다.

수업 중에 죽인 파리 시체를 치우라는 비올라의 명령에 방과 후 교실에 남게 된 스틱. 자신과 비올라만 있는 교실에서 파리를 치우는 척하면서 스틱은 비올라의 하얀 목덜미를 지그시 바라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작게 움직이는 그녀의 목덜미.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을 막히게끔 하는 그 목덜미. 그러나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겠지. 자신은 학생이고 그녀는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일 뿐이니까.

그런데 상황은 갑자기 변하게 된다. 수업 자료를 함께 가지러 간 자료실에서 스틱은 갑자기, 말그대로 갑자기 비올라에게 키스를 한다. 자료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비올라가 고개를 돌릴 때, 다가가는 스틱. 그러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는 비올라. 그러나 그둘은 괘도 뒤에서 다시 또 입을 맞추게 된다. 천천히, 천천히 비올라의 목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스틱. 이 순간을 잡는 감독의 장면 연출이 참으로 세련됐다.

스틱이 비올라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흘러나오던 노래가 있다. 헨델의 아리아 중, '울게하소서'. 수업 중인, 혹은 복도를 걷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나오던 노래. 심지어 아침 일찍부터 그녀 집 앞까지 달려가,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맡는 그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역시 그 노래는 나온다.

스틱의 눈빛은 그야말로 애절함 그 자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그의 눈빛은 그 안타까움으로 젖어있었다. 짝사랑은 힘든 것이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그 둘은 가까워진다. 수업 중에 자신만의 신호를 주고 받으며 웃는 모습을 보면 여느 연인들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둘은 정말로 연인이 된 것일까?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잠이 안오는 밤, 비올라가 준 열쇠를 들고 가는 장면에서도, 비올라의 생일날 말쑥하게 차려입고 백합을 들고 오는 장면에서도 그런 의문은 계속 되었다.

비올라는 남편 프랭크와 결혼생활이 무미건조했다. 그리고 스틱은 성에 관한 궁금증이 많은 사춘기 소년일 뿐이었다. 그 둘은 단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난 것이지 않을까?

남편의 잠옷을 입고 있는 스틱에게 비올라는 자신의 집에 남편 몰래 올 때 주의해야할 사항을 일러주고 스틱 역시 조심 조심하며 그녀의 집으로 온다. 그녀의 남편 프랭크에게 들킬 때도 영어 보충 공부를 하러 온다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육체적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심저어 비올라는 점심 시간에까지 스틱과 관계를 갖는다. "점심시간은 아주 짧단다." 라고 말하며 급하게 옷을 벗는 그녀. 그렇다. 그 둘의 만남은, 단지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것일 뿐, 그 이상과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의 집을 오가다 남편 프랭크와 친해진 스틱. 프랭크는 나약한 40대일 뿐이었고, 스틱은 그런 프랭크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속옷 장사를 하다 빚을 잔뜩 지게 된 프랭크가 속상한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식탁 위에서 뻗고 만 어느날, 그런 와중에도 그의 부인인 비올라는 스틱과의 잠자리가 더 중요할 뿐이다. 속이 훤히 보이는 잠옷을 입고 나와 스틱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는 비올라. 프랭크가 저런 모습인데도. 자신이 맺고 있는 비정상적인 관계로 인해 혼란스러운 와중, 스틱이 사랑하는 형이 잠수함 울프호의 사고로 죽고 만다.

육체로 탐하는 것으로 시작된 쾌락적 관계를 정신마저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 영혼의 교감이 없는 그런 만남은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다. 그것도 서로에게 안 좋은 모습으로.

스틱은 이제 그녀 침대 위로 가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 스틱 때문에 비올라는 극심한 분노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인, 유급을 가하게 된다.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도 됐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우리는 단지 섹스만 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스틱의 눈빛은 영화 초반부에 나왔던 그 눈빛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의 눈빛은 그녀의 모든 것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그런 눈빛이었는데.

그의 사춘기는 전쟁, 육체적 탐미, 형의 죽음 등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감정의 조율조차 쉽지 않는 그런 때에 어느 것 하나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영화 제목과는 달리 결코 아름답지 않는 청춘의 나날들.

학생들이 예배를 보고 있는 교회로 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 시늉을 하며 비올라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끝으로 그는 밖으로 나간다. 물론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이런 혼란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는 진정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할 수있다. 그 누구보다도 괴로워하고 고민할 때, 진정 자라나는 법이니까. 물론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간 뒤에 돌이켜보면 내 사춘기 시절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런 시간들이었다고 말하는 여느 사람들처럼 그 역시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때, 창문을 여는 비올라를 바라보던 스틱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순간만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처음의 그 순수했던 마음이 육체에 집착하게 됨으로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집착은 언제나 그러한 법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 웃음 짓게 했던 그 마음을 한순간에 바꿔버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청춘>
엘비라 마디간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보 비더버그의 작품.
96'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9년만의 공백끝에 만든 이 영화를 끝으로 97년 5월 1일 67세로 세상을 떠남.
이 둘의 만남은 집착으로 인해 굴절되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은 깊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터 속의 스틱은, 당신을 만나던 그때 나는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내 사춘기 시절은 '아름다운 청춘' 이라 불릴만한 나날들이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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