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나게 슬프던 영화, 마리 이야기. 사실 마리 이야기는 그 어떤 기대 없이 보러 간 영화였다. 하지만 특별히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이유는 없었지만 보러가야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개봉 전부터 꼭 보러가겠다고 친구와 약속한 영화였다. 마리 이야기는 내게 있어.
1시간 20분동안 흘러나오던, 어떤날의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음악은 헤엄치던 남우를 감싸안아주었던 따뜻한 바다의 느낌 그대로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과 동시에 흐르던 희열님의 허밍, '우리가 사는 이곳', 남우가 마리의 손을 잡을 때 나오던 그순간,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던 선율, '하늘높이' 가 흐를 때, 나는 영화 속 세계로 빠져들고 싶었다. 영화 속 마리와 남우의 손을 잡고 하늘로, 바다로 헤엄치고 싶었다.
처음에 나는 마리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이겨내려고 남우가 만들어낸 환상적 존재로서 생각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어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우. 그런데 동네 아저씨가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오려고 한다. 남우는 그런 아저씨의 친절을 무시하고 모른 척한다. 아버지의 부재, 그로 인한 혼란, 바쁜 어머니와 아픈 할머니 밑에서 자라느라 채 받지 못한 그 부족한 사랑을 고양이 '요' 를 통해 채우려는, '모두들 너무 빨리 내 곁을 떠나...' 라고 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리는 그런 현실을 잊기 위해 남우가 만들어낸 환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우가 사춘기적 혼란스러움을 거치며 그 현실을 이겨내고 나면 마리라는 존재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가 남우가 빚어낸 환상이라면 남우만 볼 수 있어야했다. 하지만 마리는 남우만이 볼 수 있고, 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준호 뿐 아니라, 준호의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가 배를 타고 나간날, 그리고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던 순간, 마을 사람 모두는 마리가 만들어낸 세계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펼쳐지며 폭풍우를 몰아내는 순간, 마을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본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렇다면 마리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리를 '우리가 잊고 지냈던 것들' 이라 말하고 싶다. 어린시절에는 늘 알고, 지켜보던 것들을 사람들은 나이가 먹으면서, 세상에 치이면서 너무나 많이 잊고 지낸다. 그렇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 남우가 등대에 찾아갈 때마다 늘 볼 수 있는 마리와 마리가 사는 세계를 보지 지 못하는 것이다. 폭풍우가 치던 밤, 남우와 준호에 의해 한번, 단 한번만 보게 될 뿐. 이렇듯 마리 이야기는 그 시절의 꿈과, 소망, 상상 등을 잊지 말라고, 가슴 속에 묻혀졌던 그것들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날아오르던, 바다속에도 숨쉴수 있는, 꽃잎 위에서 아주 편히 낮잠을 자던, 그 시절을.
마리와 마리가 사는 세계는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에 고이 지닌 채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혀질 뿐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떠올렸던, 잊고 지냈던 시간은, 바로 내 고교시절, 매일 밤 91.9 메가 헤르쯔에 주파수를 맞춘 다음, 희열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기를 쓰던 시간이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역시 그러하겠지. 예전의 시간 속으로 남우처럼 유유히 헤엄치며 웃겠지. 아마도.
"변한 건 나였어. 잊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한테 약속했었던 것 같은데...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할 거라고..." -어른이 된 남우의 독백
그대와 함께하던 마리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보태기 하나. 마리 이야기에 쓰인 색은 참 이뻤다. 수채화를 그릴 때마다 내가 즐겨쓰던 색들이 화면 속에 펼쳐져서 참 좋았다. 특히 구름과 구슬의 표현은 실제로 보는 것처럼 실감났다.
보태기 둘. 입모양과 목소리가 너무 맞지 않아 그 부분이 상당히 거슬렸다.
보태기 셋. 어린시절 자신만의 꿈과 환상의 세계가 없었던 사람은 상당히 재미없는 영화이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몽환적이기 때문에 스토리도 없고, 구성력도 없는, 돈만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1시간 20분동안 흘러나오던, 어떤날의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음악은 헤엄치던 남우를 감싸안아주었던 따뜻한 바다의 느낌 그대로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과 동시에 흐르던 희열님의 허밍, '우리가 사는 이곳', 남우가 마리의 손을 잡을 때 나오던 그순간,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던 선율, '하늘높이' 가 흐를 때, 나는 영화 속 세계로 빠져들고 싶었다. 영화 속 마리와 남우의 손을 잡고 하늘로, 바다로 헤엄치고 싶었다.
처음에 나는 마리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이겨내려고 남우가 만들어낸 환상적 존재로서 생각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어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우. 그런데 동네 아저씨가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오려고 한다. 남우는 그런 아저씨의 친절을 무시하고 모른 척한다. 아버지의 부재, 그로 인한 혼란, 바쁜 어머니와 아픈 할머니 밑에서 자라느라 채 받지 못한 그 부족한 사랑을 고양이 '요' 를 통해 채우려는, '모두들 너무 빨리 내 곁을 떠나...' 라고 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리는 그런 현실을 잊기 위해 남우가 만들어낸 환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우가 사춘기적 혼란스러움을 거치며 그 현실을 이겨내고 나면 마리라는 존재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가 남우가 빚어낸 환상이라면 남우만 볼 수 있어야했다. 하지만 마리는 남우만이 볼 수 있고, 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준호 뿐 아니라, 준호의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가 배를 타고 나간날, 그리고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던 순간, 마을 사람 모두는 마리가 만들어낸 세계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펼쳐지며 폭풍우를 몰아내는 순간, 마을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본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렇다면 마리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리를 '우리가 잊고 지냈던 것들' 이라 말하고 싶다. 어린시절에는 늘 알고, 지켜보던 것들을 사람들은 나이가 먹으면서, 세상에 치이면서 너무나 많이 잊고 지낸다. 그렇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 남우가 등대에 찾아갈 때마다 늘 볼 수 있는 마리와 마리가 사는 세계를 보지 지 못하는 것이다. 폭풍우가 치던 밤, 남우와 준호에 의해 한번, 단 한번만 보게 될 뿐. 이렇듯 마리 이야기는 그 시절의 꿈과, 소망, 상상 등을 잊지 말라고, 가슴 속에 묻혀졌던 그것들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날아오르던, 바다속에도 숨쉴수 있는, 꽃잎 위에서 아주 편히 낮잠을 자던, 그 시절을.
마리와 마리가 사는 세계는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에 고이 지닌 채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혀질 뿐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떠올렸던, 잊고 지냈던 시간은, 바로 내 고교시절, 매일 밤 91.9 메가 헤르쯔에 주파수를 맞춘 다음, 희열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기를 쓰던 시간이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역시 그러하겠지. 예전의 시간 속으로 남우처럼 유유히 헤엄치며 웃겠지. 아마도.
"변한 건 나였어. 잊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한테 약속했었던 것 같은데...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할 거라고..." -어른이 된 남우의 독백
그대와 함께하던 마리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보태기 하나. 마리 이야기에 쓰인 색은 참 이뻤다. 수채화를 그릴 때마다 내가 즐겨쓰던 색들이 화면 속에 펼쳐져서 참 좋았다. 특히 구름과 구슬의 표현은 실제로 보는 것처럼 실감났다.
보태기 둘. 입모양과 목소리가 너무 맞지 않아 그 부분이 상당히 거슬렸다.
보태기 셋. 어린시절 자신만의 꿈과 환상의 세계가 없었던 사람은 상당히 재미없는 영화이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몽환적이기 때문에 스토리도 없고, 구성력도 없는, 돈만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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